물질세계의 전복
20대 초반까지만 해도 친구들과 주고받는 선물은 그 자체로 기쁜 것이었다.
특히 처음으로 생일에 고급 화장품 브랜드의 값비싼 크림을 생일 선물로 주었던 친구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말로만 축하하고 싶지 않아서,
이러한 축하 메시지의 서두는 오히려 말로 전하는 축하로도 충분히 기쁘고 행복할 수 있었던 현실의 방증이었다.
그때 우리에겐 선물이란 마음 위에 얹어진 부가적인 무엇, 그리하여 이미 꽉 찬 행복감을 더욱 넘치게 만들어주는 진심 어린 표현의 수단이었다.
사회생활을 하고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러한 '마음'이 물질로 치환되는 세계 속으로 조금씩 옮겨가게 된 듯하다.
마음은 말보다는 선물로 표현될 뿐만 아니라 그 선물의 값어치에 따라 마음의 값어치도 정해지게 되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아무리 진심을 담아 인사를 건네어도 함께 가는 선물이 없으면 무언가 빠진 듯 휑하고 진정성이 부족한 느낌이 드는것이 아쉬웠다.
그렇지만 이러한 느낌을 애써 지워버리며 이 세계의 문법에 따라 가능한 범위 내에서 내 마음을 담은 선물을 건네고 또 건네받으며 즐겁게 지내 왔다.
이십 대 후반이 되자 이런 세계의 계산법은 더 노골적으로 진화했다. 주변인들의 결혼이나 부모님의 장례 같은 경조사에 나가게 되면서부터이다.
고교시절 친구의 청첩장을 받고 처음으로 인터넷에 '친구 결혼식 축의금'을 검색해보며 사람 사이의 거리나 그 사람에 대한 소중함의 척도가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자의 눈금만큼이나 분명하게 아로새겨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건 나에게 불편한 감정을 주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따르지 않을 수도 없는 무척이나 견고한 일종의 법칙이었다. 점점 마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소비하는 느낌이었다.
특히 사회적 관계로 엮여 실제로는 마음이 없음에도 축하한다는 뜻을 '돈으로' 표현해야 했을 때는 마음을 착취당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럴 때 나는 세상보다도 나 자신이 싫어졌다.
이제 마음은 물질로 치환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복되었다고 느낀다.
아무리 진심을 담아 축하를 해도 봉투에 담긴 돈의 액수가 그 말의 실체인 것처럼, 또 마음의 증거인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세계에서 나는 얼마만큼의 물질을 구비해야 내 마음을 온전히 표현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그만 서글퍼졌다.
돈으로는 다 표현될 수 없는 마음이라는 것도 있는 것이다. 누군가의 기념일을 위해 모처럼 진지한 태도로 책상에 앉아 고심해가며 한 자 한 자 편지를 써내려 본 지도 퍽 오래되었다. 그러나 클릭 한 번으로 무엇이든 보내줄 수 있는 이 세계에서 그러한 신중함과 번거로움이야말로 아직까지 물질로 다 치환되지 못한 무엇은 아닐지.
물질세계가 전복해버린 세계에서 이제는,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으며 건넬 수 있는 마음이야말로 가장 희귀한 선물이 되었음을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