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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노신 Mar 26. 2022

그 자체로 훌륭한 모르겠다는 고백

당신을 잠 못 들게 한 편지의 첫 문장을 시작할 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대학교 1학년, 나는 교내 학생상담센터를 통해 집단상담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다.

서로 이름과 나이를 모르는 사람들과 10주간 익명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한 번은 옆 자리 사람과 짝을 이루어 상황극을 하며 서로의 감정과 내면을 살피는 시간이 있었다.

당시 나와 짝에게 주어진 상황은 꽤나 당혹스러워서 나는 한참이 "어.. 어.."라고 말을 더듬다가 겨우 이렇게 말을 꺼낸 것이었다.


그때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본 상담 선생님은 나를 향해 빙긋 웃으며 이렇게 답했다.


"그 말씀 그대로, 지금 짝을 보면서 말씀해 보세요.

내가 지금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이 경험 이후로 나는 말문이 막히는 상황이 올 때마다 이 말을 기억한다.

친구와 싸워서 화해를 청할 때,


"ㅇㅇ야, 정말 미안하다. 내가 너한테 지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누군가에게 위로를 해야 할 때,


"ㅇㅇ님, 뭐라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누군가에게 고백을 할 때도.


"내 마음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말은..."



사람은 복합적인 존재이기에 스스로도 자기의 마음을 다 알 수가 없다. 기민하고 똑똑한 사람들도 자기의 진짜 속마음을 시간이 지난 후에야 깨닫게 되는 경우가 왕왕 있다.

하물며 서투르고 탈 잦은 평범한 나 같은 이에게는 오죽할까.

어떻게 가야 할지 모르는 길에 들어서 멈칫했다가 일단 눈 딱 감고 한 발을 내딛는 기분으로 나는 쿵쾅대는 가슴을 안고 이렇게 겨우 입을 떼어 본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한편으로 무슨 말로도 쓸쓸한 마음을 달랠 길 없고, 어떻게 생각해도 모든 것이 잘못된 것처럼만 느껴질 때에도 누군가에게 어렵사리 털어놓은 이야기 끝에 나는 이 말을 듣고 싶었던 것 같다. 너무 매끈하고 단정한 말들보다는 오히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라는 조심스러운 헤아림의 그 말을.




편지 서비스의 전문가로 일하면서, 나는 종종 난처한 입장에서 어려운 상대에게 편지를 써야 하는 고객들을 만나곤 했다.


"그 어른께 너무 죄송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저에게 상대가 많이 화가 났는데 어떻게 사과를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좋아하는 마음이 큰데 어떻게 다 담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럴 때 나는 스무 살 시절, 내가 전수받았던 귀중한 요령 하나를 꺼내어 들고 편지의 첫머리를 열어가 본다.


"무슨 말씀을 어떻게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때 모르겠다는 말이 주는 이와 받는 이에게 모두 위안이 되는 이유는, 그것이 무책임한 말이 아닌 최대한으로 헤아려보려 애썼으나 성공하지 못했다는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겸손함의 표현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내 마음을 혹은 당신의 마음을 내가 다 '모른다'는 말은 그 자체로 훌륭한 고백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을 전하기 위해 애써 편지까지 쓸 정도로 중요한 사람에게 '모른다'는 말을 하는 것은 멋쩍고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렇게 자신을 낮추는 순간, 상대방의 긴장된 마음은 조금쯤 풀어지고 두 사람 사이에 흔들거리나마 붙잡고 건너갈 수 있는 조그마한 다리가 생긴다.


그러니, 지금 편지를 쓰려고 하는데 어떻게 첫 문장을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바로 그 말에서부터 시작해보면 어떨까?


지금 어떤 말부터 시작해야 할지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만, 최대한으로 노력해보겠다는

용기와 다짐을 담아

"무슨 말을 어떻게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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