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단은 우리 집 앞에 도착한 아이스박스였다.
현관문 앞에 자리 잡은 그것을 보며 잘 못 온 것이 아닌 지 잠시 멍을 때렸다. 박스에 적힌 주소지를 확인하는 순간 배송지를 본가가 아닌 우리 집으로 적은 것이 떠올랐다. '지금 방송하는 손질 오징어 좀 주문해줘'라는 엄마의 카톡에 주문하면서 배송지를 확인하지 않은 것이 실수였다. 이미 가득 찬 냉동고를 정리한 뒤 그렇게 오징어들은 우리 집으로 들어왔다.
오징어의 존재조차 까먹은 채 며칠이 지났다. 여느 때처럼 배달 앱을 켜고 무엇을 시켜 먹을지 고민하다 갑자기 배달 음식의 향이 느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종 오징어 요리를 검색하다가 무난한 오징어 볶음을 해보자며 냉동고에 있던 것을 꺼내놨다. 깨끗하게 손도 씻고 레시피를 보며 양념장을 따로 만들기 시작했다. 레시피 그림과 다르게 고체의 형태를 띠는 그것에 본능적으로 간장과 고추장을 더하며 최대한 유사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작은 도마에 오징어와 채소도 썰어 나름 야무지게 그릇에 담아 놓았다. 식용유에 파를 넣어 파 기름도 내고 프라이팬에 재료들을 순서대로 더했다. 가스레인지에 정신없이 튄 양념들을 둔 채로 완성된 볶음을 그릇에 담아 식탁으로 옮겼다. 제 멋대로 썰어진 양파들을 빼고는 그럴싸한 모습 덕인지 불을 쓰면서 나온 온기 덕인지 몰라도 식탁 위는 참 따뜻해 보였다.
요즘 취미라고 말할 수 있는 특정한 무언가를 꾸준히 했던 적이 있나 싶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몰두할 정도로 즐길 수 있는지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일까. 잡다한 생각이 떠오르는 걸 애써 누른 채 양념이 잘 묻은 행복을 입에 넣었다. 그러고는 꾸준하지 않음에도 순간을 즐길 수 있는 것들을 내 취미라고 말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