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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작 Jul 27. 2023

10세는 만두피가 두껍다고 했다

- 제목은 만두지만, 만두 이야기는 아닌 이야기 (응?) 

(*이 글은 블로그에 쓴 글을 옮긴 것으로 <2022년 2월> 시점의 글입니다)


"으아아아아아아ㅏ악..."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어제 콘도에서 졸린 눈으로 렌즈를 빼서 씻다가, 손이 살짝 미끄러졌고, 손가락 사이에서 있던 하드 렌즈가 세면대 구멍 사이로 빠져버렸다. 손은 얼어붙고 뇌는 엉켰다.


난왜이럴까조금만조심할걸전에도이랬는데나는왜렌즈를막는망을쓰지않는가바로앞에있는데전에는세면대를막고썼는데조심성도없는데게으르기까지하구나여기는안경점도없는데내일은어쩌나하드렌즈비싼데이게얼만데와짜증나어쩌지어쩌지어쩌지아짜증나아짜증나


예전에 아주 작은 벌레 이야기가 나오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줄거리는 잘 생각이 안 나는데, 작가의 말은 기억난다. 작가는 어느 날 렌즈를 세면대 하수구 사이로 빠트렸고, 아주 작은 벌레가 있어 이 렌즈를 꺼내주면 얼마나 좋을까란 생각을 하다, 소설을 구상했다고 했다. 나도 딱 그 심정이었다. 작은 벌레를 고용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고개를 숙이고 세면대 마개 사이 - 손가락도 안 들어가는 그 틈 사이로 - 헛된 희망을 품고 자꾸만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정말, 이 사이에 붙어 있는 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언뜻 파란색 렌즈가 벽에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좁은 틈 사이로는 아무것도 넣을 수가 없었다.


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세면대 하수구 마개를 뺄 수 있다-빼고 싶다, 빼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어제는 간절히 이걸 빼고 싶다, 빼야만 한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에는 무작정 당겼다. 그러나 아무리 당겨도 소용없었다. 어떡하지 하다가 살짝 돌려봤다. 그러자 바로 풀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돌려보니, 그곳에 정. 말. 렌.즈.가. 끼.어. 있.었.다(자연스럽게 BGM이 나온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 작은 틈 사이에 세로로 낀 렌즈. 흘러내려가지도 않고 그곳에 있었다. 이것이 기적이 아니면 무엇이 기적이란 말인가! 손가락이 들어갈 수 없는 좁은 폭이라 나무젓가락을 가져와 조심스럽게 꺼냈다. 드디어 내 손바닥 위로 다시 돌아온 작고 작은 하드 랜즈! 난 쇼생크 탈출의 주인공처럼 외쳤다.


"20만 원 벌었다!!"


남편은 언제나 나의 이 논리에 혀를 끌끌 차지만,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하드렌즈는 무려 30만 원!! 렌즈 한쪽만 다시 사도 15만 원이다. 그 사이 더 올랐을 수도 있고, 내일 렌즈가 없어 고생할 일이 줄었으니 적어도 5만 원은 더 써야 한다. 그러니 약 20만 원을 번 게 아니면 무엇이겠는가(나는 스스로 아주 만족해하면서 쇼핑몰을 열고, 오늘 20만 원을 벌었으니(응?) 뭘 좀 사볼까 궁리를 했다).


이 같은 기적이 일어난 장소, 안면도로 온 건 머슴과 하녀 노릇을 잘 한 우리 스스로의 공을 치하하기 위한 것이었다. 1월에 남편 월급통장에 나름 목돈이 더 입금됐다. 휴가를 못쓰면, 다음 해로 넘어가지만 그 합이 30일이 넘으면, 그 이상 휴가는 돈으로 쳐서 나온다고 한다. 그러니까 작년 못 쓴 휴가와 올해 휴가가 합쳐져 30일이 훌쩍~ 넘은 것이다. 남편은 현재 1년 반 정도 재택근무 중이다. 나는 십 년 넘게 재택근무 중이나, 나는 내 마음대로 안 하다가 한다. 하지만, 남편은 일의 종류가 다르다. 하루 종일 줌으로 회의를 하고 또 한다. 점심시간은 거의 없고, 내가 보기엔 머슴(?)처럼 일한다. 머슴의 십장(?)쯤 되지만, 머슴은 머슴이다. 쉼 없이 24시간 돌아가는 IT 업종이라 새벽이나 주말에 일도 많이 한다. 그 결과 휴가를 다 못써서, 머슴세(라고 부르고 싶다)로 나온 것이다.


나는 그렇게 받은 머슴세를 가지고 예약할 곳을 찾기 시작했다. 그렇다. 나는 뭐가 좀 생겼다 싶으면 쓸 궁리를 아주 잘한다. 무엇보다 명절을 앞두고 있었다. 명절은 내가 (조금 과장을 하자면) 시녀 체험을 하는 기간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대단한 명절 노동을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런 건 아니다. 시댁은 제사를 지내지 않아, 명절 노동이란 것을 딱히 해 본 적이 없다. 명절에 시댁에 가도 실제로 작업을 하거나, 글 쓰는 척하며 노트북 앞에 앉아있는 시간이 더 길다. 어머님은 정말 인자하고 정이 넘치시는 분이다. 그러나 '명절 시녀 체험'은 육체적 노동이 힘들기 때문에, 혹은 특별히 나쁜 개인의 예외적인 언행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 아니다. 가부장적인 구조의 이야기다. 삼 시 세끼를 먹고, 과일을 먹고, 간식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해야 한다. 어떤 결정을 하고, 어디로 가야 한다. 이 모든 과정에서 (조금 과장하자면) 나는 결정권은 없고, 해야 할 일만 있는 시녀와 다르지 않다. 


무엇보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불합리한 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밥 푸는 순서다(두둥!).


아니 애초에 왜 밥 푸는 순서가 있는지도 모르겠는데, 그렇다고 해도 나이 순도 아니고 왜 유치원생보다 내 밥이 더 늦게 퍼진단 말인가. 나보다 밥 순서가 늦는 사람은 딱 한 사람. 어머니다. 이 부분이 제일 짜증 난다. 가장 고생하시는 분이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 어머니 손이 간 음식인데 왜 남은 밥을 모아서 먹는단 말인가. (나는 어릴 때부터 이게 싫어서 몰래 순서를 뒤바꾸거나 아무 때나 푸고, 혼자 좋아했다).


그러니까 명절은 우리 사회의 불합리한 구조의 단면을 탁 잘라 보여주는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을 끊임없이 직면해야 하는 시간들이다. 이제 나이가 들어 나름 원만하게(?) 대처하고 있지만, 절대 익숙해지지 않는다. 여전히 입맛이 쓰다.


10세는 스스로에게 '멋이란 게 흘러넘친다'라며 노래를 완창 했다. 


아무튼 명절 연휴를 지나자마자 남편은 며칠의 휴가를 냈고, 우리는 안면도로 왔다. 처음에는 아이들에게 뭔가 남을 수 있는 역사 탐방(?)을 할까 하는 생각도 했으나, 뭐 그렇게까지, 싶었다. 무엇보다 여기저기 다니는 게 귀찮았다. 어차피 머슴과 시녀 체험 끝에 가는 건데, 그저 한 곳에 머물며 쉬다 오다 싶었다.


찾다 보니 안면도 아일랜드 리솜에 조식과 스파가 함께 있는 아주 괜찮은 패키지가 있었다. 가격이 약간 있었으나 머슴 수당 들어온 게 있기도 하고, 이것저것 따져보면 그리 비싸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2박 연박을 하면 짐을 다시 싸고 풀고 하는 시녀 노릇을 하지 않아도 되니, 좋았다. 여행의 목적에 맞는 탁월한 선택이다.

그렇게 온 안면도 콘도에서 나는 세면대 하수구로 빠진 하드렌즈를 다시 찾는 '기적'을 경험했다!!!

아, 정작 놀러 온 이야기는 안 쓰고, 앞뒤 다른 이야기만 길게 쓰다 보니 지친다. 그만 쓰고 싶지만, 그래도 놀러 온 이야기는 짧게라도 써야지. 첫날에는 게국지와 게장 정식을 먹었다. 게국지라는 게 뭘까 싶었는데 먹고 있는데, 또 먹고 싶은 맛이었다. 나는 생 갑각류 알레르기가 있어서 다른 건 못 먹고 게국지만 먹었지만 다른 가족들은 다른 것도 다 맛있었다고 한다. 역시 현지의 맛인가.

아일랜드 리솜으로 와 체크인을 하고, 바로 앞바다로 갔다. 칼바람을 맞으며 바다 위 노을을 봤다. 1호는 멋진 사진 찍느라, 2호는 바다를 보며 '만남은 쉽고, 이별은 어려워'를 완창 하느라 신났다. 결국 신발이 젖었지만, 2호는 스스로에게 '멋이란 게 흘러넘친다'라며 좋아했다.



둘째 날은 운 좋게 창가 자리를 잡아 바다를 보며 조식을 먹었다. 종류도 많고 신선해서 나름 괜찮았는데, 미식가(?) 2호는 만두피가 너무 두껍다는 이유로 '질이 떨어진다'라고 평했다(죄송합니다. 셰프님. 애가 몰라서 그래요). 그러나 세 접시를 아주 배부르게, 그리고 맛있게 먹었으니 도대체 2호가 말하는 '질'이란 무엇인가라는 생각이 든다. 조식을 배부르게 먹고 스파 시작 시간에 맞춰 가서, 하루 종일 놀고, 선 셋을 보고 나왔다. 날은 흐렸지만 스파 하기엔 좋았다. 사람들도 정말 없어서, 했다. 어제처럼 아름다운 선셋이 아니라, 아쉬웠지만, 보트도 타고 몽글몽글한 하늘 사이로 살짝씩 물들어가는 빛이 몽환적이었다. 배터리가 나갈 때까지 사진을 찍었다.


숙소로 돌아와 통닭을 시켜 밥과 먹으며 다 같이 TV를 봤는데 '너의 목소리가 들려'가 나왔다. 오랜만에 보니 재미있었다. 실력자들 노래도 좋고. 중간에 나오는 광고도 재미있고.


먹고 누워 책을 보다 이 글을 쓴다. 바다에 오니 <노인과 바다>를 봐야 지란 합리적(?) 이유로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챙겨 와 보고 있다. (또 다른 합리적인 이유로는 섬에 오니 이탈리아 작가의 글을 읽어야 지란 이유로 이탈리아 소설을 챙겨 왔다.) 반 정도 읽었는데, 노인이 미끼를 문 물고기에게 끌려 바다로 가고 있다. 헤밍웨이는 10년 넘게 '넌 이제 작가로 끝났어'라는 평을 듣다가 <노인과 바다>를 내놨다고 하던데, 어떤 마음으로 이 소설을 썼을까. 바다로 가고 있는 노인을 보는데, 홀로 글을 쓰고 있을 노년의 헤밍웨이 생각이 자꾸 난다....라고 멋있게 쓰고 싶지만, 사실은 너무 잠이 온다. 일찍 일어나고, 하루 종일 놀았더니 눈꺼풀이 무겁다. <노인과 바다> 읽다가 스르르 잠들 수 있게. 일단 이를 닦고 와야겠다.





ps : 아침에 조식을 먹기 위해 일찍 일어났는데, 산 위로 해가 뜨고 있었다. 우리는 마운틴 뷰인데(바다 뷰가 아니라 실망했는데) 이런 추가 선물이 있을 줄이야! 산 위에 뜨는 일출과 바다로 지는 일몰을 모두 볼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니 근사한 기분이 들었다. 노트북을 꺼내서 뭐라도 쓰고 싶은 마음이 마구 일며 (그러나 쓰진 않았.... 그냥 멍하니 누워 있었....) 이참에 일찍 일어나기를 한 번 해볼까 하는 (실현 가능성 아주 낮은) 생각도 들었다. 자연의 힘이란 이렇게 위대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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