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3.15
영화가 시작된다. 방에 물이 가득 잠겨 있다. 그 사이에 누군가 평온히 누워 있다. 그 위로 이어지는 자일스의 내레이션은 말에서 말로 전달되어 온 어떤 동화의 세계를 상기시킨다. 자일스의 목소리는 둥글고 친절하며, 아름다운 환상을 직접 목도한 이의 것처럼 붕 떠있다. 이 목소리의 뉘앙스가 영화 전반을 예고한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은 동화이기를 꿈꾸는 영화 같다. 일라이자가 잠에서 깨어난 직후 이어지는 이미지는 친숙한 동화의 것들이다. 유리 너머의 구두를 바라보는 일라이자의 얼굴이라든지. 동화 속 공주―왠지 디즈니의 신데렐라가 입었을 법한 옷을 입고 있는 일라이자라든지. 버스 안에서 창밖을 보는 그녀의 얼굴도 왠지 모르게 동화 속의 소녀―혹은 공주들을 떠올리게 한다. 특히, 물가에서 발견된 고아이자 목덜미에 상처가 있는 농인 일라이자는 오늘날 스크린 너머로 새로이 탄생한 인어공주 같다.
듣는 이를 다소 상기시키는 낭만적이고도 유려한 음악도 그렇고, 카메라의 동선과 프레임 안을 거니는 인물의 움직임도 일상의 리듬이라기보다 이야기의 리듬을 가리킨다. 일라이자의 집이 있는 건물의 구조 역시 다분히 그렇다. 그녀의 집 바로 아래에는 영화관이 있다. 영화적 순간을 고대하는 동화 속 그녀들에겐 꿈같은 집일 것이다. 동화이기를 선포하는 처음은 끝까지 이어진다.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은 어렵거나 모호하거나 생각지 못한 것을 불현듯 사유케 한다든지, 하는 식의 전위적이거나 실험적인 영화가 아니다. 오직 사랑만을 선명하게 말한다.
그런 감독의 의중 때문일까.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동화 속 인물 같다. 전형적인 악인인 실험실의 보안책임자 스트릭랜드. 이 한 사람이 그 시대―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는 폭력을 압축적으로 내보인다. 모든 짐은 스트릭랜드가 짊어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인물들은 비교적 태평해 보일 정도다. 이웃집 게이 자일스는 이웃집 게이로. 직장 동료 흑인 젤다는 직장 동료 흑인으로. 스파이 박사는 스파이 박사로. 악인은 악인으로. 입체적일수록 좋은 인물이 되는 거라면 이 영화 속 인물들은 나쁜 것일 테다. 정리하자면, 영화 속 인물들은 사람이라기보다 캐릭터에 가깝다. 감독의 그와 같은 선택은 아마도 주인공과 괴생명체 사이의 사랑, 그것에 충실하기 위함일 것이다. 주변 인물들이 평이해질수록, 그러니까 그들이 자신의 롤에 합당한 대사를 충실히 읊을수록 도드라지는 건 말이 없는 주인공이거나 주인공보다 더 말이 없는 괴생명체일 테니까. 그들도 딱히 입체적이라 할 수는 없지만 비교적 입체적이며, 지니고 있는 평이함 역시 말이 없기 때문에 희석된다.
한편, 어떤 말을 하느냐가 그 캐릭터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괴생명체의 정체성은 절대적으로 모호하다. 내내 이상한 소리를 내던 그는 사람의 손가락이나 심지어는 고양이를 물어뜯기까지 한다. 영화는 괴생명체의 정체성을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인간적인 무엇'으로 만드는데 집중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실험실에 어쩌다 이르게 되었는지 정도만 알 수 있을 뿐, 영화는 그래서 그것이 대체 무엇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영화 전반의 그런 뉘앙스는 ‘괴생명체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라는 단순한 사실에서 더 나아가 ‘이해할 필요가 없는 존재’로 만든다. 보통의 사랑이 이해를 전제로 하는 것이라면,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이 그리는 두 생명 간의 사랑은 보통의 사랑, 그 전제를 가로지르는 무엇이 된다.
이해가 없어도 가능할 사랑은 물의 속성과 유사하다. 어떤 형태든 될 수 있는 그것은 '나는 너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라는 순서를 뛰어넘고 다짜고짜 무엇이든 되어버린다. 벌써 넘나들어 서로를 침범한다.
일라이자와 괴생명체의 사랑. 그것의 이유 혹은 과정을 충분히 그려내지 못했다는 말은 그래서 타당한 한편 고루하다. 영화는 두 인물이 그래서 왜 사랑하게 되었는가에 방점을 찍지 않는다. 인간이 아닌, 미지의 타자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가에 있지도 않다. 영화가 설명하는 게 있다면 그건 사랑은 그저 온몸으로 하는 거란 것―위험에 처한 괴생명체를 대체 왜 구하려 하냐는 자일스의 질문에 정말 ‘온몸으로’ 열렬히 수화를 하는 일라이자의 모습은, 그래서 이 영화의 가장 압도적인 순간 중 하나이다.
나도 그 사람처럼 입을 뻥긋거리고 소릴 못 내요. 그럼 나도 괴물이에요?
동화, 하면 공주와 왕자, 괴물과 마녀 같은 것들이 떠오른다. 괴물이 남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동화들―<미녀와 야수>라든지 <개구리 왕자> 같은 동화에서 괴물은 어찌 되었건 사랑의 확인으로 자행되는 입맞춤 뒤엔 늘 인간이 되었다. 원래 인간이었던 이가 어떤 저주로 인해 괴물이 되었는데, 원래 인간이었기 때문에 인간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지만, 숱하게 받아온 상처를 어찌할 바 몰라 정말 괴물과 다를 바 없게 되었고, 이를 공주가 회개시킨다는 이야기는 물론 매력적이지만, 한편 지나치게 인간적이다. ‘괴물’이 무언가를 은유한다면, 정상이라 이해되는 범주에 속하지 못하고 늘 배제되어 비가시적 존재로 남는 것들일 테다. '괴물이 인간으로 변하는 서사'는 결국, 괴물에 관해 그 무엇도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셰이프 오브 워터 : 사랑의 모양>에서 괴물이었던 자는 끝까지 괴물이다. 다른 이와 공감하며 소통을 할 수 있다지만 그렇다고 인간적인 무엇이 되지는 않는다. ‘인간이 되지 않는 괴물 서사'는 오롯이 어떤 범주 밖의 이들을 조망한다. 그리고 그건 인간이 괴물에게 자신의 공간 하나를 내어주는 순간에까지 다다른다. 화장실 하나에 물을 가득 채워 헤엄을 치며 사랑을 나눈다는 것. 이 사랑 사이에는 물이 있다. 물은 딱딱하게 굳어버린 어떤 것이든 물러지게 한다. 화장실을 메운 물방울은 아래로 흘러 영화관을 적신다. 스크린 너머의 사랑을 감상하던 관객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물방울은 스크린 밖에 존재하는 사랑 혹은 영화의 도래처럼 보인다.
물이 범람하는 방에서 사랑을 나누는 환상적 이미지는 지금껏 우리가 당연한 방식이라 여겨온 사랑의 방식에 질문을 던진다. 사랑은 땅 위에서만이 아니라 물속에서도 가능했다는 것. 괴물에게 모든 공간을 내어주는 인간이 실제로 가능한가의 여부를 차치하고, 그런 환상적인 비주얼을 스크린 밖의 우리 모두가 목도했다는 것. 다른 형태의 사랑을 상상할 수 있게 되는 힘은 그 자체로 어떤 운동이 된다.
사랑을 빌미로 모두가 인간이 되는 동화를 벗어나 오직 사랑으로 물아래를 유영하는 두 생명의 입맞춤―그리고 사뿐히 떨어지는 구두 한 켤레, 는 설령 이 영화의 배경인 냉전시대와 아주 무관하거나 혹은 지나치게 낙관적인 무엇일지라도 다분히 정치적이고 전복적이다. 때때로 낙관과 낭만과 사랑만이 전부가 될 때, 세상이 바뀌기도 하니까.
영화의 가장 마지막에서 그들은 바다이다. 두 사람이 뛰어들었다지만, 한편으로 그 세계로부터 추방된 것이기도 하다. 일라이자는 어쩌면 물아래에서 죽고 살기를 반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전혀 모를 괴물―타자와 온전히 함께 있고자 죽고 다시 사는 시간을 무한히 반복한다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면?
사랑에 대한 이 같은 정의는 비단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나 아닌 다른 이와 함께 있기 위해 스스로를 내몰고 다시 스스로를 세우는 과정은 아플 것이며, 그것이 무한히 반복되는 거라면 더욱 아플 것이기 때문이다. 실은 아주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영화―넓게는 이야기만이 내보일 수 있는, 내보여야만 하는 사랑의 방식이기도 하다.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는 무수히 실패하고 있더라도 타자와의 사랑, 그것의 본질은 분명 이것보다는 그것에 가까울 테니까.
2018.3.15
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