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다정이 May 04. 2020

5. 시를 쓰는 마음과 요즘

2018.2.23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쓰는 게 한 달에 두어 번이 되었다. 영화를 잘 모르니까 아무래도 주관적인 감상 위주일 수밖에 없는데, 하나 둘 적고 보니 무언가가 사라지고 있다는 기분에 마음이 다급해졌다. 내 개인적인 기억과 단상이 하나둘씩 없어지는 것 같다는. 그와 동시에 내가 쓰는 건 주관적이라 다른 사람들도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인지 확신할 수 없다는 점. 그래서 단언할 수 없는 문장들로 A4용지 두어 장을 겨우 채운다는 점. 내용에 이렇다 저렇다 확신에 찬 목소리가 미진한 것도 왠지 모를 콤플렉스가 되었다. 견고한 글을 쓰고 싶었다.


그래, 이제와 하는 겸연쩍은 다짐이지만 영화를 보다 전문적인 느낌의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야! 대뜸 그렇게 다짐하고서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평론 책을 추천해 달라 부탁했다. 그때 친구 R이 신형철 평론가의 <정확한 사랑의 실험>(마음산책, 2014)을 추천했다. 언젠가 <몰락의 에티카>를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있어서 그날 당장 한 권을 구입했다. 거기엔 보지 않은 영화도 있었고 본 영화도 있었는데, 아무래도 후자의 내용을 먼저 읽어 보았다. 이창동 감독의 <시>도 있었는데, 마침 글을 써야지 점찍어둔 영화라 얼른 읽어보았다. (그건 잘못된 선택이었다.)


글에는 고개가 끄덕여지는 문장들이 가득했다. 이를테면, 견고한 글이었다. 다 읽고 나서는 전문적인 느낌의 문장은 벌써 포기했고, 조금 분한 마음도 들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이런 거 절대 못써 빼액, 하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당황스러운 마음이다.) 나는 과연 영화 <시>에 대해 무얼 말할 수 있는가를 생각도 했다. 결국 아주 주관적인 감상들이 먼저 떠올랐다. 내가 영화를 보다가 좋다고 생각해버린 장면들이.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하는 사람이구나, 체감도 하면서. 이제부터 있을 이야기는 영화 <시>에 대한 주관적 중구난방이다.






시를 쓰는 미자는 할머니이다. 몸이 불편한 늙은 남자를 돌보는 일을 한다. 딸이 있고 손자가 있는데, 손자와 함께 산다. 손자는 집에서 조용하다. 한창 사춘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밖에서 무슨 일이 있는가, 미자는 궁금해도 손자는 답이 없는 게 으레 보편적인 가정의 모습이다. 그리고 미자는 조금 아프다. 병원에 갔더니 치매 증상이 있다고 한다. 시에 관심이 있었던 미자는 조금 더 시에 골몰한다. 자신에게 부여된 병명이 아주 없는 영향은 아니었을 테다. 아직 볼 수 있고 그걸 기억할 수 있는 예쁜 지금들을 시로 써두어야지. 모두 까먹을 테니까. 마지막까지 저에게 남는 것들은 예쁘고 고운 것들이었으면 하니까. 미자는 길을 걷다 예쁜 꽃을 보거나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볼 때면 종이를 꺼내 쓴다. 그런 고운 것들에 유독 마음이 가고 눈길이 간다. 시 쓰는 모임에도 등록해서 참가한다. 마지막 수업에는 본인이 쓴 시를 가져와야 하는 모임이다. 거기에 가면 어린 시절 기억들을 꺼내어 말할 수 있다.


그런 미자에게 예감도 없이 사건이 온다. 얼마 전 강에 투신한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가 성폭행 피해자이며, 자신의 손자가 가해자 중 한 사람이라고. 사람들과 있는 미자는 피해자 가족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 하며 돈은 얼마를 드려야 하는지의 것들을 얘기 나눈다. 요는 조용히 넘어가자는 것이다. 그 사이에서 미자는 잠자코 있다가도 예쁜 무엇에 마음이 사로잡혀 시를 쓰기도 한다. 갑자기 닥친 치매기거나 회피이거나, 둘 다이거나.





반면 혼자 있는 미자는 여기저기를 간다. 시를 쓰기 위해 고즈넉한 길을 거닐다가도 학교에 가거나 성당에 간다. 발길 닿는 곳이 어째 그 어린 여학생과 닿는다. 미자는 빈 교실을 아주 오래 들여다보기도 하고, 죽은 아이를 떠나보내는 성당 구석에 앉아 가만히 듣기도 한다. 그러다 황급히 도망도 친다. 예쁘고 고운 것만 봐도 간신히 버티는 지금, 무엇도 예쁘지 않은 현실이 닥쳤을 때. 미자는 그걸 마주하려다가도 회피하기 일쑤다. 가끔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로 손자를 마구 때리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는 피해자 가족을 직접 만나야 한단다. 사람들이 건네는 이야기로만 전해 들은 걸 직접 보는 건 어려운 일이다. 이제와 사라진 아이의 뒷모습을 좇는 것보다 아이의 공백과 부대끼고 지금을 살아내는 가족을 만나는 일이 어쩌면 더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조심스레 찾아간 피해자 희진의 집에 가족은 없다. 다행일까, 미자는 잠시 길을 걷는다. 그리고 평소처럼 예쁜 세상을 천진하게 읊다가 덜컥 희진의 엄마와 마주친다. 고운 할머니가 참 고운 말씀을 하시네. 그렇게 말하는 희진의 엄마는 미자가 가해자의 가족인 걸 모른다. 반면 미자는 뒤늦게 알아챈다. 순간 모든 게 부끄럽고 절망적이었을까. 도망치듯 황급히 걸음을 옮긴 미자는 강을 보며 비를 맞는다. 기억을 않는다는 건 아픈 사람이 이렇게 많은 세상에서 안하무인이 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것 참 못나지는 일이라고, 미자는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건 치매에 걸린 미자에게 참 커다란 일이었을 것이다. 그 뒤로 미자는 버스를 타고 늙은 노인을 방문한다. 피해자 가족에게 건넬 돈을 그렇게 만든다. 저녁에는 손자와 배드민턴을 친다. 그때 형사가 도착해서 손자를 데리고 간다. 일찍이 미자가 신고한 것이다. 멀어지는 손자의 뒷모습을 보는 미자의 얼굴이 모호한 가운데 견고하다.


그리고 미자는 시를 쓴다. 이제는 없는 이가 되어보기 위해. 물끄러미 무언가가 되려는 이의 조용하고 단단한 자세가 화면을 가득 메운다. 다음날, 미자의 딸이 엄마를 부르는 가운데 미자는 집에 없다. 마침 시 쓰기 수업의 마지막 날이기도 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쓴 시는 있는데 미자가 쓴 시는 없다. 미자도 없다. 다만 미자의 시점으로 보이는 컷들이 이어진다. 집 앞, 집 근처, 버스 안에서 본 바깥 풍경, 그리고 희진이 강에 몸을 던졌던 다리까지. 내내 미자의 목소리는 시를 읊는다. ‘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어젯밤 써낸 시일 것이다. 미자의 목소리가 어느새 희진의 것이 될 때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그렇게 미자는 다리 위에서 희진을 만난다.






영화 <시>하면 떠오르는 장면은 무척 많지만 유독 기억나는 장면은 영화 말미, 미자가 시를 쓰는 때이다. 책상에서 무언가를 적어내리다가 멈추었다가 다시 또 적어 내리던 미자가 책상과 가까이한 정도. 구부정했던 어깨와 등. 종이를 들여다보던 옆얼굴. 펜을 쥔 손, 같은 것들이.


왜 그런 것들이 내게 선명했는지 잘 모르겠다. 분명한 건 앞으로 두어 시간가량 내내 미자가 저 모습이어도 나는 끝까지 영화를 볼 수 있겠다, 함께 할 수 있겠다 하는 마음이었다. 시를 쓰는 미자를 응원했다. 영화의 시간은 곧 다음날이 되었지만 카메라 바깥의 미자는 진실로 그 자리에 오래 머물렀을 것이다.




영화 <시>는 미자의 삶을 빌어 이런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세상에 이렇게 예쁘고 고운 게 참 많은데요, 그래서 시는 지금 무엇이어야 하나요. 아름다움과 시를 쓰는 마음에 대해 내내 묻던 미자는 이제 그 아름다움 혹은 시를 쓰는 마음이 무엇인지 알겠다는 확고한 얼굴로 시를 썼다. 그렇게 완성된 시는 처음엔 미자의 것이었다가 희진의 것이 됐고, 아마도 미자는 희진이 그랬던 것처럼 강 위로 몸을 던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까 이제는 사라져 없는 목소리에 제 목소리를 바치는 행위가 그녀에게 시가 된 것이다. 그건 으레 ‘예쁜 말’로 이해되는 시의 가장 우울한 자리이기도 하거니와, 사라져 바깥에 놓인 이들을 위한 기도이자 지금 가능할 윤리이기도 하다. 타자를 향한 가장 완벽한 투신. 시가 가능할 아름다움은 그것이라고 <시>는 답한다.  




나는 나밖에 모른다. 그래서 타자의 세계라고 일컬어지는 것들이 솔직히는 어렵고 모호하고, 상상하기도 벅차다. 그런데 미자는 타자를 향한 마음을 정말로 되게 했다는 점에서 내겐 어렵고 무서운 한편 마음이 쓰이는 사람이다. 책상 앞에 앉아 시를 썼을 때 외로웠을지도 모르겠다. 그랬을 미자를 상상하면 입을 앙 다물게 된다. 손자를 신고한 일에 아주 잠깐은 자책했을지도 모른다. 미자도 사람이니까. 하지만 기어코 사라진 목소리 편에 서겠다 혹은 그 목소리가 되겠다는 곧은 결심이 그녀의 시가 됐다. 그건 너무 커다래서 내게 가능할 일인가 싶기도 하다. 그건 정말 ‘시’인데. 나는 ‘시’를 조금 격이 다른 무엇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서, 그건 정말 날 때부터 뭔가를 갖고 나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해서. 그런 시적인 순간은 내게 결코 없을 일 같다.


그럼에도 왜 거동이 불편한 노인을 돌보며 돈을 벌고, 손자와 함께 살고, 치매에 걸린 할머니였을까를 생각해 본다. 시를 쓰고 싶지만 그게 잘 안되어서 ‘시 쓴다는 게 대체 뭐예요?’ 만나는 사람마다 물어보는 할머니. 그 할머니에게 언제 시가 가능했는가도 생각해본다. 예쁜 것들만 하염없이 들여다보면서 시상에 잠기려 했을 때는 도무지 안 됐던 게, 피해자의 가족을 만나고 쏟아지는 비를 맞고 손자를 신고한 뒤로 가능했던 것에 대해서.


그러니까 '시'는 거창하거나 고귀하거나 예쁘거나, 특별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다. 기본적인 윤리일 따름이다. 법과 질서만으로는 해낼 수 없는, 인간이기에 가능할 어떤 도리 같은 것. 그리고 그건 생각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미자가 손자를 제 손으로 신고했듯 어떤 행동으로 가능한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어떤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시'는 이미 우리 주변에 존재하고 있다. 이를테면 최근의 미투 운동 같은 것.


언젠가 아무도 모르게 사라졌거나 아예 없었던 목소리들이 지금은 여기저기에 있다. 제 목소리이거나 가까운 사람의 것이거나 아예 모르는 사람의 것이거나, 아주 많은 목소리들이다. 그리고 당신의 목소리에 나 역시 함께합니다. 나도 당신과 다르지 않습니다. 나에게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 마음들이 미투 운동이 되었다. 희진을 향한 미자의 마음이 '시'가 되었던 것처럼. 실로 영화 바깥의 시적인 순간이다. 그 사이, 많은 이름들이 가해자로 호명됐고, 그중에 시인들도 있었다. 대다수 위기를 모면하거나 서로를 위하거나, 아무튼 급급한 모습이다.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이런 마음들이 있는데, 정작 시인들에게는 도무지 시적 상상력이 없는 세상이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어쩌고 있는가. 미자만큼일 수 없고, 내 목소리로 내 이야기를 커다랗게 꺼내놓는 사람일 수도 없는데. 그래도 미자가 시를 썼던 때를 떠올리려 한다. 그렇게 잠자코 들여다보고 잠자코 응시하며 열심히 들을 참이다. 나는 나밖에 몰라서, 타자의 세계를 상상하기가 너무 벅차서, 그들의 얘기를 곧이곧대로 들을 수 없는 사람이지만 내 안에서 그들의 이야기가 한참을 곡해되고 고꾸라지더라도 그만큼 반복해서 들을 생각이다. 이게 내게 가능할 아주 작은 시적인 순간이라 믿는다.     


 




2018.2.23



 


2  다짐이 이제와 희미해진  같다. 글을 옮겨 적으며 다시 다짐을. 고꾸라진다면 그만큼을 반복해서 듣는 사람이 되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4. 내가 싫어했던 그 동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