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추가 훌쩍 지났다. 곧 거짓말처럼 겨울이 오겠다. 겨울에 자주 맬 가방을 꺼냈다. 거기에는 오래전 노트에 써놓았다가 찢어서 접어둔 종이 몇 장이 있었다. 그중 한 장에는 2년 전, 안국역 근처를 산책할 때 보았던 장면이 적혀 있었다.
그러니까 2년 전, 안국역 근처에 있는 횡단보도를 지나고 있을 때였다. 안국역 어느 출구에는 주유소가 하나 있다. 거기서 한 아저씨를 보았다. 가을이었나 겨울이었나 정확한 계절은 기억나지 않는다. 아저씨는 맨발이었다. 맨발이었다는 게 인상적이었으므로 아마 조금 추운 계절이었을 것이다. 아저씨는 맨발에, 파란색에 가까운 남색 츄리닝을 아무렇게나 걸치고 있었다. 바지 밑단은 무릎 언저리까지 끌어올린 모양으로, 아저씨는 격렬하게 총질을 했다.
주유소 근처에는 'n'자 모양의 시설이 설치되어 있었다. 아저씨는 그 시설을 요충지로 삼고서는 맨손을 총 모양으로 만들어 총질을 했다. 다른 손으로는 투명하고 기다란 총 하나를 품에 안은 모양을 했고 다른 손으로는 탕, 탕, 탕. 아저씨가 있는 곳, 그 건너편에는 무심히 지나가는 차들과 가만한 도로, 건물이 전부였는데 그중에 하나를 향해서였는지 혹은 그 무엇도 아닌 허공을 향해서였는지 아저씨는 입으로 슝슝 소리를 내면서 총질을 했다. 서너 걸음 뒤에는 주유소 직원이 있었다. 하지 마세요, 일어나세요. 짜증이나 화, 난처함 같은 것은 하나도 없는 얼굴과 목소리로 직원은 말했다.
그맘때에 나는 영화 <하트 로커>를 봤었다. 그 영화에는 전쟁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온 남자가 있었고, 나이를 먹을수록 좋아하는 것이 적어진다던 그 남자는 다시 전쟁터로 향했었다. 하필이면, 안국역에서의 그 장면이 어떤 농담 같다고 생각했다.
2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요즘도 나는 안국역 근처를 자주 걷는다. 산책 루트가 변하지 않은 까닭이다. 최근에는 안국역에 있는 횡단보도에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중에 바닥에 있는 이상한 흔적을 보았다. 누군가의 토사물을 닦아낸 듯한 흔적이었다. 묘한 형광으로 눈에 띄는 주황색이 바닥에 기다랗게, 아주 기다랗고 얇게 이어져 있었다. 다소 거리가 있는 도로에서부터 여기까지 흔적이 이어져 있다는 게 신기했다. 누군가 토를 하면서 여기까지 당도한 걸까. 아니면 여기에서 토를 하다가 저기 도로까지 당도한 걸까. 어느 방향이든 난처한 장면이겠다. 어쩌면 토사물의 흔적이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럼 묘하게 거북한 형광으로 눈에 띄는 주황색은 대체 무엇일까, 아무래도 토사물밖에 없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에 마침 신호등은 초록불이 되었고 나는 잠깐 농담 같은 순간들을 생각하다가 횡단보도를 건넜다.
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