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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다몬 Nov 28. 2023

나의 평온한 혼돈

아이의 산만함이 안겨 준 선물

다이어트 의지를 활활 태우며 홈트를 시작했다. 넘치는 의욕을 주체할 수 없어서 브런치 글로도 발행했다. 매일 1시간씩 흥겹게 땀을 쫙 빼며 나날이 뿌듯한 한 주를 보내리라 작정했던 것인데 둘째 날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시간도 의지도 충만하건만, 종아리 아래쪽에 단단히 알이 잡히며 제대로 스트레칭도 못 할 정도로 근육통이 와버린 것이다. 그 이튿날에는 어깨로 통증이 왔다. 아, 이건 병원에 가야겠다. 저질 체력 생각 못하고 신난다고 지칠 때까지 운동을 했던 탓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테니스를 치다가(당시 입문 2개월) 같은 부위의 근육 파열을 겪은 게 불과 2년 전인지라 넘실대는 의욕을 잠시 넣어두었다. 어딘가에서 푸슈슉 김새는 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지난날을 들추어보면 나는 이런 사람이었다. 꽂히면 앞뒤 생각 못하고 극한까지. 노는 것도, 일하는 것도 그랬다. 그러는 동안 그 외의 꾸준히 필요한 일상은 근근이 숨만 붙어있을 정도로, 일상적인 일상으로 돌아올 때까지는 메타인지가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스스로 이런 성향이 장점이라 여기기까지 했다. 아이를 키우기 전까지는.




아이를 키우면서 많은 것을 내려놓았다. 이 시기를 보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는 일임에도 나는 지나치게 당혹스러웠다. 적응을 잘 못했다는 뜻이다. 나는 계획적인 사람은 아니지만 주어진 일들을 그럭저럭 해왔고 어떤 부분에서는 좋은 성과를 내기도 했는데, 아이를 키우면서 모든 것이 무너졌다.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안이한 마음으로도 잘만 살아왔는데, 오히려 단기간 몰입할 때는 지독하리만치 해내곤 했는데, 육아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되고 할 수도 없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첫째가 유아기였던 시절이 가장 힘들었다. 우리는 친정엄마의 헌신적인 희생 덕분에 맞벌이를 계속하며 첫째를 키울 수 있었고, 온전히 아이를 케어해 본 경험이 미미한 상황에서 둘째를 낳았다. 둘째를 낳고 1시간 거리의 회사로 운전하여 출퇴근했는데, 퇴근길은 늘 졸음과의 사투였다. 열심히는 살았지만 내가 꿈꿨던 아이들과의 느긋하고 행복한 소소 일상은 까마득히 멀었다. 시시때때로 화가 났다. 그리고 집 안에서 내가 하기 싫은 모든 일을 도맡아 하는 남편과 엄마에 대한 죄책감이 쌓여 갔다.


둘째가 두 돌이 되기 전 퇴사를 전제로 육아휴직을 시작했다. 살림도, 육아도 이렇게까지 초보일 수가 있나 싶었지만 어찌어찌 적응해 가겠지 했는데 그냥 되는 건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족에 대한 죄책감은 더욱 커졌다. 더 이상 나의 부족함을 직장생활로 합리화할 수도, 힘든 순간에 직장으로 도피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자꾸만 개인적인 욕망과 자아실현 욕구가 많은 스스로를 탓했고, 아무리 애를 써봐도 시간과 공간이 무질서한 상황이 한심했다. 육아휴직을 하면 당연히, 하고자 하는 것에서 대부분 그래왔듯, 육아도 잘할 줄 알았는데 뭔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됐다. 효능감은 날로 떨어져만 가고 답답증과 억울함이 나를 잠식했으며 불안정한 정서는 아이들에게(특히 첫째에게) 흡수되고 또 다른 모습으로 발산되었다. 내가 내려놓은 것은 욕심이 아닌 자존감이었다. 내가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적응한 태도는 수용이 아닌 체념이었다.




호기심과 에너지가 많고 섬세하며 감정의 기복이 큰 데다 애착도 불안정했다고 추측되는 첫째는 참으로 키우기 쉽지 않았다. 나는 아이를 사랑했지만 걱정스러웠고, 때로는 나아질 길이 보이지 않아 억울하고 힘겨웠다. 그런데 초등 1학년 2학기 무렵부터는 틱증상까지 나타나 한참이나 계속되는 것이었다. 심상치 않다고 느껴 관련 서적과 영상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을 이 책에서 찾았다.



아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세요.


육아서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나는 이 말을 ‘아이의 모습이 부족해 보이더라도 아이가 나빠서 그런 것이 아니란 점을 받아들이고 감내해야 한다’는 뜻에 가깝게 이해했던 것 같다. 그조차도 실천은 잘 못했지만.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서 더욱 선명한 안경을 쓰고 저 말의 의미를 또렷이 볼 수 있게 되었다.


산만한 아이의 특별한 잠재력.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충동적이고 주의집중이 잘 되지 않는, 한 마디로 '산만한' 아이를 키우는 부모를 위한 책이다. 아마 대부분이 나처럼 육아에 어려움을 느끼고 걱정스러운 마음을 안고 펼쳐보는 책이리라 예상한다. 충동성과 감정 조절력이 부족한 듯한 첫째를 이해해보고 싶어서 읽기 시작했는데, 이 안에서 뜻밖의 보물을 발견했다.




책에는 산만한 기질을 대략적으로 파악해 보는 문항들이 있다. 어린 시절의 나, 자유로운 나를 떠올리며 해보니 대부분의 항목이 '예'로 체크되었다. 아마 빈도와 정도까지 따지면 일상생활에 크게 지장을 받을 만큼은 아니겠지만, 나는 ADHD 성향을 갖고 있는 산만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후 관련 전공자인 친구가 보내준 검사지로도 이것저것 해보았는데 매번 전문의의 상담을 권하는 결론이었다. 내가 정말로 병원에 가야 할 정도이든지, 스스로 다소 과하게 느꼈든지 간에 아무튼 나는 그런 특성을 갖고 있다는 거다.)


내가 가진 이러한 특성은 기복 없이 꾸준히 아이를 모범적으로 양육하거나, 집을 깔끔하게 정돈하거나, 일과 가정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게다가 절대적인 시간과 에너지가 부족한 육아 환경에서도 자꾸만 무언가 충동적으로 시작하게(그리고 성취 없이 사그라들게) 만들었다. 그렇게 좌절의 경험이 쌓이고 우울했던 나는 계속해서 180도 반대 편의 사람이 되려 애쓰고 그마저도 실패하기를 반복하면서, 자존감은 끝도 모르고 추락했고 생기를 잃어 갔던 것이다.


요컨대 나는 스스로의 산만한 특성을 약점으로 보고 바람직한 모습으로 수정하고 싶어 했다. 문제는 아이에 대해서도 같은 시선이었다는 것. 아이를 있는 그대로도 충분히 괜찮다 인정해주지 못하고, 약점인 산만함에도 ‘불구하고’ 사랑해주어야 할 존재이자 일방적인 인내와 포용의 대상으로만 바라보았다. 미처 소화되지 못한 몰이해와 부정적인 감정이 쌓이고 아이를 ‘바르게’ 바꾸지 못한 나는 매일 실패하고 있었다.



이 책에서는 산만한 아이를 바라보는 특별한 프레임을 몇 가지 알려준다.

넓은 시야를 가진 사령관

규칙에 매이는 것을 싫어하는 창의력 대장

실험을 좋아하는 과학자

빠른 보상에 만족하는 신속한 사냥꾼

부정적인 프레임으로 표현한다면 세밀하게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는 대충대충 덤벙이, 제멋대로 통제불능 문제아, 굳이 귀찮은 짓을 벌이는 괴짜, 충동적이고 꾸준하지 못한 부진아가 될 텐데.


긍정적인 프레임으로 바라보니 아이도, 나도 꽤 근사해 보였다. ‘타고난 사냥꾼 유전자라니, 멋지잖아!’


자극 추구, 왕성한 호기심이 특징인 ADHD 성향은 질환이 아니다. 연구*에 따르면 유목민 전통을 유지하던 케냐 부족에서는 오히려 이 성향을 지닌 이들이 그룹의 리더로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반면 근대화된 학교와 회사에 적응한 케냐 부족에서는 이 성향을 지닌 이들이 적응에 어려움을 겪고 낙인찍히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한다.

*2008년, 미국 노스웨스턴대학 인류학과 교수인 댄 아이젠버그와 위스콘신대학 신경인류학과 교수인 캠밸은 환경에 따라 ADHD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알아보는 연구를 했다(<산만한 아이의 특별한 잠재력> 본문내용 중).


산만한 이들은 고도의 주의집중력과 멀티태스킹을 요구하는 규격화된 근대 이후의 문명 환경(특히 학교와 직장조직)에서는 적응이 어려운 부분이 있고, 이로 인해 여러 가지 불편함과 사회적 편견이 초래된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 행복한 생존을 위해서는 분명 남들보다 좀 더 애써서 조절력을 기르거나 적절한 도구를 활용하는 등의 방법을 찾아야 할 테다. 그러나 결코 이 성향이 ‘산만함’이라는 부정적인 뉘앙스의 개념으로 묶여 통째로 다듬어져야 할 것으로 치부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다행인 점은 근대보다 현대, 그리고 미래로 나아가면서 점차 다양성이 존중받고, 삶의 환경을 유연하게 설정할 수 있는 선택지가 넓어지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이다.




비록 에너지 분배에 실패하고 나의 대책 없음을 마주했지만 괜찮다. 나의 산만함을 알아챈 뒤로 덤벙덤벙 살기로 맘먹은 덕분이다. 어찌 보면 내가 ‘이런 사람’이라서 해낼 수 있었던 것들이 모여 지금이 되었는 걸.


완벽한 플랜을 세워 실행하고, 한 번 시작한 것은 끝까지 해내고, 모든 물건에 자리를 만들어 제깍제깍 정리하고, 매일 규칙적으로 영양제를 챙기고, 아이들과 체계적으로 엄마표 학습과 습관을 만들어가는 건 애초에 내겐 무척이나 어려운 일, 아니 안 되는 게 당연했던 일이란 사실이 무척 기뻤다. 나의 부족함에 정당성이 부여됐고, 더 이상 내게 당연하지 않은 것들을 기준으로 삼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어찌나 안심이 되던지. 남편과 엄마에게도 이 기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해방감까지 느꼈다.


나, 이런 사람이야!


놀라울 것도 없이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으며 내가 ‘나아지기를’ 바란 적도 없었다. 그저 내가 구멍 내는 부분을 묵묵히 채워줄 뿐. 나는 이미 가장 소중한 이들에게 있는 그대로 수용되고 있었는데 나만이 스스로를 못났다며 타박하고 있었나 보다.


이 즈음부터였던 것 같다. 내가 핸드폰이나 물건을 집 안에서 잃어버려도 그닥 화가 나지 않게 된 것이.


그리고 첫째에게도 너의 산만함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인생을 다채롭고 활기차게 살 수 있는 귀한 선물이라고, 다만 툭 튀어나와 자신과 타인을 불편하게 하거나 상처 입히는 것들은 좀 더 노력하여 잘 다듬어보자고 말하며 진심으로 격려해 줄 수 있게 되었다. 부주의로 발생하는 많은 일들에 있어서 심각해지기보다 해결/개선 방안을 이야기하게 된 것도 우리의 편안한 나날에 보탬이 되었다.


물론, 멀리서 보면 아름답다는 거고. 여전히 우린 일상 전쟁터에서 레벨업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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