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알파벳처럼 쉽지만 상대에겐 고대 로마자처럼 어렵다.
"이건 남프랑스의 랑그독이라는 지역에서 나온 시라-무르베드르-그르나슈 블렌딩 와인으로, 뜨거운 햇살을 받고 자란 덕에 풀바디감과 짙은 블랙베리향이 뛰어납니다. 그러면서도 포도밭의 일교차가 커서 산미도 높아 균형감도 탁월하지요."
와인을 공부하고, 좋아하고, 와인을 소개하는 일을 업으로 삼다보니 위와 같은 문장들이 입에서 청산유수처럼 흘러나오게 되었다. 매번 이렇게 와인을 소개할 때마다 내 머릿속은 포도가 자란 환경부터 최종 와인의 품질까지 한 편의 영화처럼 촤르륵 지나간다. 와인바를 열고나서도 손님에게 와인을 설명할 때면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싶어 안달이었다. 당신이 어떤 와인을 마시는지, 이 와인에서 어떤 맛을 기대할 수 있는지 말이다. 그래서 새로 들이는 와인들을 보다 정확하게 소개하기 위해 와인 자격증을 따는 것처럼 열심히 공부했다.
와인바 운영 2달 반이 넘어가던 차, 맛집으로 유명한 한 고깃집에 손님으로 방문하며 내가 손님들에게 했던 설명들이 얼마나 귀에 안 박혔을지를 깨달았다. 친절한 직원분께서 이날 우리가 주문한 고기의 부위들을 설명해주셨는데(심지어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어려운 내용도 아니었다), 등심과 안심, 채끝 정도만 겨우 구분할 줄 알던 내게는 그 설명들이 어렵게만 느껴졌다. 나는 맛있는 고기를 먹으러 갔는데 막상 고기가 왜 좋은지, 어떻게 좋은지는 알기 어려워하는 손님이었다. 오히려 고기 자체의 이야기보다는 이 맛있는 한끼를 위해 직원분들이 쏟은 노력, 고기와 함께 곁들일 반찬들에 담긴 이야기들이 더 기억에 남았다.
고깃집을 나오고 나서야 우리 와인바를 들러 나의 기나긴 와인 설명을 들었을 손님들에게 미안해졌다. 나는 이 와인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떤 맛이 나는지 알려주면 와인을 더 맛있게 마실거라고만 생각했다. 내가 쉽게 이야기할 수 있으므로 받아들이는 상대방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손님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을 열심히 들어주었는데 그 시간이 와인을 더 다가가기 어렵게 만들지는 않았을까 걱정스럽다.
고객이 듣고 싶은 내용이 뭘까?
마케팅, 비즈니스, 자기계발 서적에 끊임없이 나오는 말인데 이제서야 이 말의 의미가 이제야 뼛속까지 들어왔다. 상품이든 서비스든 무언가를 팔아야 하는 사람은 철저히 고객 입장이 되어야 한다. 자신의 분야에서 지식이 많은 것이 때로는 독이 될 수도 있다. 나의 지식은 한 켠에 잘 간직한채, 이 내용을 고객이 듣고 싶어할지 또는 그것을 꼭 전해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귀에 박힐 수 있는지 철저히 고민해야 한다. 내 주요 고객들의 성향을 파악하고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 소개할 수 있어야 한다.
또 다른 문제도 있다.
고객이 듣고 싶어할까?
이다.
내용의 좋고 나쁨을 떠나, 고객이 나와 대화하고 싶은지를 알아야 한다.
물어보지 않았는데 설명하는 것. 누군가에게는 좋은 서비스라며 기억에 남을테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TMI일 것이다. 아무리 고민한 끝에 나온 내용이어도 상대가 나를 받아들일 틈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걸 어떻게 알지? 나는 별 도리없이 실전에 부딪히며 눈치와 감으로 잡아갔다. 자리에 앉은 손님들과 한,두마디를 나누다 보면 이들이 기대하는 바를 예측할 수 있다. 얼른 주문을 한 후 함께 온 일행과의 대화에 집중하는 손님도 있고, 편하게 와인을 즐기러 왔기에 나를 대화에 끼워주는 손님도 있다. 또는 앉아있는 시간이 흐르며 바뀌기도 한다.
판매자는 교육자가 아니다. 와인과 관련한 글을 쓰고 강의를 먼저 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손님을 독자 혹은 수강생으로 대하고 있었다. 소믈리에라는 새로운 옷을 입었으니 이제는 손님을 손님으로 대하는 노력도 열심히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