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화보(Lifegraphy)를 담는 라이프그래퍼(Lifegrapher)
우리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은 12월 24일이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결혼이라니 로맨틱해 보이지만 30여년 전 젊었던 부부에게는 유일한 선택이었다. 혼전임신으로 배가 불러올텐데 식장에 비어있는 날이 그날 뿐이었던 것이다. 그후로 벌써 31년, 올해는 부모님의 결혼 31주년이 되는 해이다.
작년인 2019년 12월 24일에 부모님 결혼 30주년 기념으로 리마인드 웨딩 사진을 찍어드렸다. 친정 집과 가까운 렌탈 스튜디오를 예약해서 부모님과 동생을 불렀다. 리마인드 웨딩 사진을 찍은 이후엔 셀프 가족사진을 찍었다. 가족 사진을 찍는 건 아빠의 오랜 소원이었다. 그날 스튜디오에 도착하면서부터 아빠의 얼굴은 싱글벙글 했다. 그렇게 좋아하는 모습은 최근 몇년 중에 유일했던 것 같다.
부모님 결혼 30주년이던 그해 9월엔 나의 결혼식도 있었다. 나의 결혼을 위한 사진을 찍을 때 내가 입었던 원피스를, 엄마가 결혼 30주년 기념 사진을 찍을 때 다시 입었다. 엄마의 결혼식 때 뱃속에 있었던 내가, 엄마의 결혼 30주년에 결혼을 하다니. 참 의미 있는 해였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한다. 부모님 결혼 30주년에 찍은 사진들을 보면 모두들 행복하게 웃고 있지만, 나는 이 사진들을 볼때 마냥 기쁜 생각만 들지는 않는다. 참 오랜 세월 힘든 여정을 거쳐왔다. 우리 모두. 이 사진들은 굴곡진 감정과 상처들을 각자의 노력으로 차곡차곡 메워온 결과물이다.
이미 결혼을 전제로 양가 인사를 드린 이후에 임신한 거였는데도, 뱃속에 내가 있다는 이유로 엄마는 모진 말을 들어야 했다. 오래 전에 들었기에 확실치는 않지만, 잘난 아빠의 발목을 잡는다는 식의 뉘앙스였던 것 같다. 그 잘났다는 아빠는 내가 어릴 때부터 매일 술을 마셨다. 엄마는 결혼과 동시에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고, 몇년간은 나와 동생을 돌보는 것에 전념했지만 곧 생활고 때문에 어린 남매를 떼어두고 동네 마트에 나가서 일해야만 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날, 교실에 들어가기 전 엄마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 여자들의 힘도 세지는 시대가 온다고. 요즘은 여자아이들이 공부도 더 잘한다고. 정확한 문장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이런 류의 말이었다.
아빠는 술독에 빠져 의처증 비슷한 행동으로 엄마를 괴롭혔다. 어린 나와 내 동생이 집에 있었는데도 안방 문을 걸어잠그고 엄마를 두드려 패기도 했다. 아빠가 화를 못이기고 내 동생에게 발길질을 심하게 한 날, 내 얼굴에도 아빠의 강한 주먹이 날아왔다. 아빠는 모두 기억을 못한다. 술에 취해서 한 행동이었기에 기억을 못 하는 건지, 아니면 잊고 싶은 기억이기에 회피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아빠를 제외한 나와 동생, 엄마는 모두 기억하고 있다.
아빠는 술과 관련된 일들만 제외하면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가족을 몹시 사랑하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부분도 있었다. 덕분에 나와 내 동생이 우리집 가정형편이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큰 어려움을 모르고 자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엄마를 때린 사람을 용서하기는 어렵다. 설령 아빠라고 하더라도. 믿었던 아빠였기에 더욱 더.
사춘기 때, 나는 엄마의 불행을 막기 위해 애초에 내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엄마가 나를 낳지 말고 엄마의 인생을 살았어야 한다고 말이다. 매일 밤 싸움 소리를 들으며 울면서 잠들고, 아침 등굣길에도 싸움 소리를 뒤로하고 울면서 길을 나섰다.
어느 날은 내가 엄마에게 왜 이혼을 안 하냐고 물었다. 당시 엄마는 용기가 없어서라고 답했다. 그때는 엄마가 아빠와 식당을 하고 있을 때였다. 나는 어렴풋이 혼자 처음부터 경제활동을 다시 시작하려니 엄두가 안 나는 것일 거라고 추측했다. 그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이모와 관련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이모의 말은 달랐다. 엄마는 나와 동생 때문에 이혼을 하지 않은 거라고 했다.
몇년 전 식당을 폐업한 후로, 아빠는 계속 집에서 쉬는 중이다. 아마 앞으로도 계속 쉴 것 같다. 엄마는 얼마 쉬지 않고 바로 동네 마트에 취업을 했다. 십여년만에 다시 마트 아줌마로 돌아갔다. 옛날엔 나와 동생을 먹여 살리기 위해 마트에 나갔던 엄마는, 이제 엄마 자신과 아빠를 먹여 살리기 위해 마트에 간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힘들거나 쉬고 싶을 때가 있어도 마트에서 힘들게 일하고 있는 엄마를 생각하면 마음을 다잡게 된다. 그 긴 세월 몸과 마음 모두 고단했던 엄마의 삶을 생각하면,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을 내고 오히려 모두에게 애정을 쏟는 엄마를 생각하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싶다. 참 대단하다.
누구보다 밝은 에너지를 지닌 사람, 키는 작지만 마음의 힘은 센 사람, 우리 엄마에게 박수를 보낸다.
매년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이 돌아올 때마다 과거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시간이 흘러서, 두드려 맞던 엄마가 집안을 책임지는 가장이 되었다. 엄마는 상처 받았던 사람이 아니라, 상처가 아무 것도 아니게 된 강한 사람으로 성장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서로 미워하고 싸워도 챙길 건 다 챙기는 가족이었기에 우리는 매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함께 해왔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한 집에 안 살고 결혼해서 나와 살기 때문에 평일이 아닌 주말, 12월 19일에 미리 모였다. 다행히 그때는 5명도 모일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카톡으로 결혼기념일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엄마와 아빠 모두 고맙다고 답장을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무력감에 힘들었던 10대가 떠오른다. 사실 20대가 되어서도 내가 가족을 위해 특별히 한 것은 없었다. 그냥 엄마도, 나도, 동생도 그냥 저마다 버티며 자기 삶을 살아왔을 뿐인데 어느새 많은 게 변했다. 이젠 예전에 비하면 참 많은 게 평화롭다. 아빠는 속을 보여주지 않는 사람이라 어떤지 모르지만, 아빠도 지금 나름대로 버티며 살아가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빠의 삶에도 더 좋은 방향으로 변화가 있기를 바란다.
부모님의 서른한번째 결혼기념일이 이렇게 지나간다.
다시, 메리 크리스마스!
사랑하는 공간에서 사랑하는 일상을 담다
보통 사람들의 손때 묻은 생활공간에서 그들이 좋아하는 일상의 모습을 사진, 영상, 글, 소리로 담고자 하는 라이프그래퍼(Lifegrapher) 단비입니다. 브런치에서는 일상화보(Lifegraphy)를 담으며 느꼈던 생각을 글로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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