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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izelnut Jul 31. 2020

시골 길을 내달렸다

   등이 축축해지는 게 느껴진다. 끈적한 기분이 너무 싫지만 내달리는 다리를 멈출 수는 없다. 아까 버스에서 엄마에게 온 문자를 보고 땅에 발이 닿자마자 뛰기 시작했다. 서울에 계신 엄마가 3달만에 딸의 방을 급습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엄마는 내심 기차역까지 나와줄 것을 바라고 문자를 보낸 모양이지만 나는 엄마보다 먼저 집에 도착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시골길을 열심히 내달리다 보면 흙먼지가 일어난다. 


   마지막 빨랫감까지 침대 밑으로 내던지니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얼른 거울을 보며 대충 땀을 훔치고 마당으로 숨을 고르며 걸어간다. 현관문 앞에 잔뜩 성이 난 엄마가 서있다. 더운 땡볕에 그늘 하나 없는 시골길은 아무리 웃음 넘치는 사람이라도 금세 이렇게 성질을 부릴 수 밖에 없다. 더군다나 엄마는 그다지 웃음이 넘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심지어 3달 넘게 서울 집에 얼굴 한 번 안 비친 딸이 여간 마음에 안 드는 게 아닐 터였다. “이 더운 데가 뭐가 좋다고 아직까지 여기서 꼼짝을 안하고 있냐”


   내가 시골에 내려 온 지 어느새 5년이 다 되어간다. 처음에는 할머니를 모시겠다는 꽤 그럴싸한 핑계가 있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그렇게 빨리 보내고도 전혀 기죽거나 의기소침해질 양반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는 굳이 할머니를 보살필 젊은이가 한 명은 가 있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 무렵 4년제 대학교도 끝이 나고 알바 자리에서 손님과 시비가 붙어 쫓겨나고 서류를 낸 기업들에선 모두 퇴짜를 맞은 우울한 시기였다. 절대 서울에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 할머니를 방패 삼아 시골로 향했다.


   시골은 아무 생각 없이 살기 딱 좋았다. 읍내에 약국 계산원 자리를 꿰찼다. 서울에서도 알바란 알바는 모두 섭렵해본 사람이라서 일이 어렵지는 않았다. 게다가 여행간다, 취직됐다, 결혼한다는 친구들과 연락이 끊기고, 보증금 올린다는 집주인 아주머니와도 더 이상 마주할 일이 없다는 점에서 천국같은 곳이었다. 서울에서는 친구랑 행복하게 심야 영화를 볼 때에도 다음 날 오픈조로 배정된 카페 알바를 걱정하고, 주말에 있을 시험을 걱정하며 지냈다. 시골은 영 딴 판이었다. 지금 행복하면 행복한 거고, 지금 슬프면 슬픈 곳이었다. 그냥 오늘만, 지금만 있는 시골이 좋아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서울에 안 올라가겠다며 버티고 있는 중이었다.


   “진짜 서울 안 올거야?” 콩국수까지 해먹고 딸이 능숙하게 설거지하는 모습을 내내 곁눈질로 눈치만 보던 엄마가 사뭇 진지하게 물었다. 그냥 좀 내려오라고 장난처럼 말하고 성을 낼 때와는 다른 목소리였다. 나는 딱히 할 말이 없어 이미 윤이 나는 접시만 하염없이 닦아댔다. “취직하라는 말 안해, 그냥 와서 네 오빠 가게에서 일 좀 배워도 되잖니.” 나름대로 엄마식으로 방안을 마련해왔다. 그치만 처음 시골로 도망쳐왔을 때 취직에 목맸던 내가 이해가 안 될 정도로 나는 이제 취직에 미련이 없었다. 여기서 약국을 하는 것도 나름 보람찬 일이다. 편찮으신 어르신들 상대하며 말동무 하는 것도 재밌고, 워낙 약사님이 칼 같으신 분이라서 다달이 월급이 현금 다발로 돌아오는 것도 쏠쏠했다. 무엇보다 서울에서 내내 머리를 무겁게 했던 스트레스들이 없었다. 시골에선 고작 한다는 고민이 우리 집 진돗개가 너무 더워 진이 다 빠지면 어쩌나, 하는 것들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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