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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숨 Mar 22. 2020

고양이 때문에 텀블러를 들고 다니게 된 이야기


  고양이들과 살면서 생긴 버릇들이 몇 가지 있다. 커피는 꼭 뚜껑 있는 머그컵에 마시고, 마시는 중간 중간 뚜껑을 닫는다. 노트북을 사용하고 난 뒤에는 고양이들이 앉을 수 없는 곳에 올려 둔다. 비닐들은 절대 바닥에 두지 않고, 집 안에 있는 모든 문들은 되도록 열어 둔다.


  우리집에 있는 고양이는 9살 야몽, 4살 쪼꼬몽, 아직 1살이 안 된 삐로까지 셋이다. 삐로는 원래 이름이 삐삐였는데 언제부터인지 나도 모르게 삐로라고 부르게 되었다. 지금 글을 쓰는 순간에도 삐로는 내 앞에서 자기 앞발을 핥다가 먹다가 하고 있다. 또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뜬다.


  17살이 되던 겨울에 언니가 노란 고양이 한 마리를 데리고 왔다. “임시보호로 데리고 있을 거야. 정들지 않게 그냥 고양이라고 부르자.”라고 했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우리도 모르게 야몽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고양이 행동발달서적 두 권과 인터넷, 엄마 월급의 도움으로 노란 털뭉치는 점차 뽀송해졌다.


  18살 무렵에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고양이를 미치게 좋아하는 사람으로 주위에 알려졌다. 누군가 내게 이렇게 물어본 적도 있다. “집에 네 동생이랑 고양이가 있어. 근데 불이 난 거야. 그럼 누구 먼저 구할래?” 그럼 난 이렇게 답했다. “고양이도 내 동생이야. 나한텐 동생 두 명이 집에 있는 거야.”


  집에 고양이가 있다는 게 익숙해지고 난 뒤에는 이상한 순간들이 생겼다. 멍하니 다른 생각에 빠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TV에는 홈쇼핑 광고가 틀어져 있는 채 야몽이의 노란색 털을 쓰다듬고 있을 때. 풍성한 햇빛이 야몽이 위로 비치면 노란색이 더욱 선명해지고 “아름답지?”라고 묻는 목소리가 내 안에서 들리는 것 같다.


  홈쇼핑에서는 고양잇과 대형동물의 무늬를 가진 모피 옷을 팔고 있다. 쇼핑 호스트는 계속해서 “이 무늬 보세요. 아름답죠~”라고 말하는데, 발음이 너무 좋아서 흘려보내기 힘든 음성이다.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TV쪽으로 시선을 보내지 않아도 그 무늬가 얼마나 아름다울 지 짐작할 수 있다. 그 옷을 사 입을 사람은 어쩌면 나랑 비슷한 취향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나도 그 무늬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고 있으니까. 내가 야몽이를 기르지 않았더라면, 멋진 고양잇과 동물들의 모습을 보고 그 가죽을 벗기고 내가 입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의미를 알 수 없는 장면들에 사로잡힐 때가 많았다. 길고양이들의 꼬리 모양을 보고 나를 무서워한다는 걸 알 수 있었던 날, “길고양이 집고양이 뭐가 다르냐, 우리집 고양이들도 잠깐 놓치면 길고양이 될 수도 있어”라는 말을 들었던 날. 닭과 의사소통하는 소년의 영상을 인터넷에서 봤는데 그게 신기하지 않고 괴로웠던 날. 돌고래 쇼를 하는 돌고래들이 즐겁지 않다는 걸 알았을 때. 닭과 의사소통하던 그 소년의 능력을 빌려 돌고래들에게 사과하고 싶었다. 너희들이 즐거울 거라고 생각해서 미안해. 내 눈에 보기 좋다는 이유로 즐거울 줄 알았어. 


  왜 나는 그런 게 눈에 보기 좋았을까. 왜 그런 게 맛있을까. 그런 질문들에는 정당한 답이 없었다. 그걸 좋아하면 안 되는 것에는 아주 논리적으로 타당하고 옳은 이유들이 있었다. 그래서 육식이건 무엇이건 조금씩 거리를 두게 되었다.


  인간의 본성에 의지해서는 세상에 해결될 일이 없겠다는 것도 그 때 느꼈다. 본성이 옳은 나침반이 될 수 있다면, 나는 돌고래쇼가 재미없었어야 했고 삼겹살이 맛없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번 일회용품을 쓰지 않거나 한 번 육식을 거부한다고 해서 내 인생이나 인간성이 크게 달라지지도 않았다. 그냥 기분이 조금 편해질 뿐. 몇몇 사람의 기분과 기호에 따라 어떤 수생동물이 죽다 살아나고, 어떤 포유류가 죽는다는 건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제도가 달라지고, 법이 달라질 거라고 생각한다. 아직도 나는 (내가 보기에)귀여운 동물들의 영상을 보고 웃고, 화려한 플라스틱의 색깔을 보면 마음이 들뜨고, 육식 음식들을 맛있다고 느낀다. 죽을 때까지 이 마음이 변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빨리 법이 만들어지면 좋겠다. 


  내 마음에 따라 누군가의 삶과 죽음이 갈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일단 오늘은 텀블러를 들고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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