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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계인 Nov 07. 2023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_김원영

누구에게도 다른 사람을 실격시킬 권리는 없다.

존엄의 순환은 그렇게 시작되고, 그 순환 속에서 존엄은 더 구체화되고, 더 강해지고, 더 중요한 가치가 된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길을 보고 그를 더 사랑하게 되듯이, 우리는 나를 존중하는 법률을 보고 그러한 법의 지배를 기꺼이 감내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궁극적으로 나를 더 깊이 사랑하고 관용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존엄하고, 아름다우며, 사랑하고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인 것이다. 누구도 우리를 실격시키지 못한다.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 김원영

 장애는 어느 날 불쑥 내 삶을 찾아왔다. 아버지가 큰 교통사고를 당하시면서 몸에 여러 불편함들을 겪게 되신 것이다. 그 시기의 나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지금도 크게 다르다고 확언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당시를 회상해 보면, 나는 달라진 아버지의 모습에 충격을 받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어쩌면 그 순간이 다름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가 내 삶의 과업이 된 순간일지도 모른다.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은 모두가 처음부터 상대를 대등하게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아니며 관계를 진행하며 변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나는 그 말에 희망을 품고, 한 발 물러났던 과거에서 벗어나 다시 한 발자국을 내딛고자 한다.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이라는 제목을 보고 실격이란 단어가 눈에 가장 먼저 들어왔다. 사전에 따르면 실격은 기준 미달이나 규칙 위반 등을 의미한다. 즉, 실격을 논하기 위해선 우선 기준과 규칙이 존재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기준은 무엇이며, 그 기준은 누가 세우는가?' 작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 위해서는 이 질문에서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무언가를 평가할 때 일반이나 평균 개념을 흔하게 활용한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실제로 평균과 완전히 동일한 사람은 없다. 평균보다 나은 측면이 있기도 하고 평균보다 부족한 측면이 있기도 하다. 그리고 평균이란 개념 자체에 그것보다 낮은 수치를 가진 이가 존재함이 담겨 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평균보다 낮은 측면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느끼고 고쳐야 한다 생각한다. 이것은 우리 자신 혹은 타인을 온전하게 바라보지 못하게 만든다. 결국 인간은 어느 측면과 시점에서 부족한 모습을 보이기 마련이니 말이다. 장애를 바라보는 관점은 이것과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 하나의 기준, 하나의 정채성으로 그 인간을 규정함으로써 다른 정체성들은 지워진다. '우리가 가진 이런 기준들은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


 최근, 페이스북에서 '결정장애'라는 단어의 사용을 지적하는 글을 읽었다. 장애라는 단어를 능력의 결여를 뜻하는 단어로 활용하는 것에 대한 지적이었다. 그것을 듣고 평소 내가 비장애인을 기준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이 경우를 제외하더라도 소수자적 정체성을 가진 이들은 삶 속에서 대등한 존재 혹은 독립적인 존재로 대우받지 못하는 경험을 숱하게 한다. 사회는 그가 가진 무한하고 입체적인 정체성을 소수자적 정체성으로 범주화하고 기호화한다. 한 개인이 여기 존재하기까지 쌓아온 이야기는 소거되고, 그가 이후에 쌓아갈 무한한 가능성이 축소되는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0조는 모든 개인의 존엄성을 보장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무색하게도 누군가는 존재를 부정당하고 존엄성이 훼손되는 일을 흔하게 경험한다. 이는 사회적 약자들이 집중적으로 겪는 일이다. 그러면 누군가는 이를 두고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과연 진짜 존엄한가? 그렇다면 왜 그런 것인가?' 저자는 그에 대해 답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다른 이들은 그 질문을 하지도 답하지도 않는데 약자라는 이유로 그걸 찾는 것이 차별이라는 것이다. 존엄성은 모두 동등하게 부여받은 권리다. 더 존엄하고 덜 존엄한 위계 또한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각자 존엄한 이유를 입증할 필요가 없다. 모든 인간이 그 자체로 존엄하다고, 우린 선택했고 선언했다. 그뿐이다.


 누군가의 삶이 실격당하는 사회에서, 개인의 존엄성을 구성해 내는 일은 소중하다. 존중은 한 존재를 온전히 마주하고 그가 걸어온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수용하는 일이기에 어려운 과정이다. 상대방을 목적으로 대할 때에야, 그를 존중할 수 있다. 우리가 완벽한 존재라서 존엄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 모두 취약한 부분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서로를 고유한 주체로 인정하려는 노력들이 우리를 존엄하게 만든다. 김원영 선생님이 이 책을 써 내려간 것도, 내가 이 책을 읽은 것도 그 노력의 일환 아니었을까?


 살아오면서 선비라는 말을 듣곤 했다. 혼자 고고한 척하지 말라는 일갈이었을까? 자신도 어느 것이 더 맞는지 안다는 고백이었을까? 중요한 것은 내가 잘나서 지적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나는 내가 누군가에게 아픔을 줬던 사람임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이다. 그리고 여전히 내 안에는 편견이 남아있다. 보이지 않겠지만 내가 하고 있는 말들은 계속 고쳐 쓴 결과물이다. 이 글을 쓰며 또다시 나를 돌아봤다.



하지만 인간의 존엄성이 가장 극명하게 빛나는 순간은 서로가 서로의 연기를 이해하고, 상호작용하면서 서로를 존엄한 존재로 대우하는 때이다. 품격이 상대방을 적절하게 접대하는 연기에 의해 구성된다면, 존엄은 상대를 환대하고 그 환대를 다시 환대하는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된다. 우리가 본래 존엄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게 서로를 대우한다기보다는 그렇게 서로를 대우할 때 비로소 존엄이 '구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_김원영, p71
장애를 받아들이는 일은 장애를 어떤 가치 있는 산물이라고 믿는 일과는 다르다. 그러한 믿음은 우리가 장애아의 출산을 손해라고 생각하는 순간 지속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가치 있는 산물이 손해라는 말인가. 그러나 장애라는 정체성이 어떤 산물이라기보다는 장애라는 경험에 맞서 한 개인이 작성해 나가는 '이야기' 그 자체라면, 우리가 그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일은 하나의 국면이 아니라 긴 삶의 시간 동안 그것을 '써나가는' 일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장애의 수용이란 결국 우리가 철저히 자발적으로 장애라는 정체성을 작성해 나가는 일을 의미하게 된다. 선유와 현오가 비록 한순간 연골무형성증을 손해라고 여겼고, 지금도 그러한 생각을 문득문득 버릴 수 없더라도 그들은 자신의 믿음을 고쳐 쓰고 또 고쳐 쓰면서 매일매일 장애를 수용해가고 있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_김원영, p153
키가 아주 작거나 얼굴에 커다란 반점이 있는 것은 나의 책임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몸으로 태어난 것이 추하고, 존엄하지 않고, 하찮다고 여기는 상황에 대해서는 나도 책임을 부담한다. 나에 대한 그런 손가락질의 원인은 세상의 잘못된 평가와 위계적 질서이지만, 그에 맞서 내 존재의 존엄성과 아름다움을 선언할 책임은 우리 자신에게 있다. 이것이 '정체성을 수용한다'리고 말하는 사람들이 취하는 실천적 태도이다.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_김원영, p154
모르겠다. 다만, 지금까지 우리가 이야기해 왔던 모든 요소들, 즉 존중, 수용, 자기 서사, 권리에 대한 투쟁, 아름다움이 차곡차곡 누적되고 농축되고 혼합되어 피부와 뼈, 색, 냄새를 가진 우리의 신체가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당신과 나는 우리의 신체를 포기할 수 없다. 우리의 신체가 비록 추하고,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더라도 말이다.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_김원영, p288
당신이 장애를 수용하고 역경을 돌파하는 당당한 삶을 보여주지 못하더라도 당신의 부모, 형제, 연인, 친구, 이웃은 여전히 당신을 사랑할 좋은 이유를 가질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삶이 존중받을 만하고 아름다울 수 있음을 입증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투쟁 속에서 어느 순간 강인한 투사의 모습이 아니라면 결코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는 외로운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아도 좋다. 장애를, 예쁘지 않은 얼굴을, 가난을, 차별받는 인종, 성별, 성적 지향을 지닌 채 살아가면서도 모든 것을 당당히 부정하고, 자신의 '결핍'을 실천적으로 수용하고, 법 앞에서 권리를 발명하는 인간으로 설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렇게 서야만 우리가 존엄하고 매력적인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을 수용하고 돌보려 노력하지만 결코 완전하지는 못할 '취약함'이야말로, 각자의 개별적 상황과 다른 정체성 집단에 속해 있는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공통분모일 것이다.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 김원영, p 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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