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logue2
"이진암"이야기를 처음 듣는 것은 아니었다.
박노해 시인의 부인, 나눔문화재단을 세운 김진주 선생님과 선생님의 사찰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 차례 들었던 터라 강사장님이 거제도 이진암에 가자고 했을 때 나는 망설이지 않고 가방을 싸서 따라나섰다.
이진암은 산의 중턱에 위치해 있었다.
바로 앞에는 거제바다가 펼쳐져 있었고, 그 뒤로는 하늘을 향해 끝없이 높아지는 산이 계속됐다.
그 산의 꼭대기는 '옥녀봉'이라고 불렸다.
전설에 따르면,
옥황상제의 딸이 죄를 지어 그 산 꼭대기에 환생했는데, 현세의 아버지가 그녀를 욕망의 대상으로 삼으려 했다. 딸이 저항하며 “짐승처럼 소리 내면 받아주겠다”라고 말하자, 아버지는 옷을 벗고 ‘음매 음매’ 소 울음소리를 내며 딸에게 기어갔다. 그 순간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 아버지는 타 죽었고, 딸은 다시 하늘로 돌아갔다고 한다.
인면수심의 아비를 낙뢰로 벌하고 자식을 하늘로 데려간 곳.
그 옥녀봉 중턱에 이진암이 있었다.
이진암에서는 거제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4미터 높이의 거대한 해수관세음보살이 잔잔한 바다와 어지러운 세상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진주 선생님은 우리에게 본인 거처를 내어 주시고 본인은 절의 공양간 숙소에서 머무시며 정성 가득한 밥상을 차려주셨다.
새벽 밤, 세상이 잠들어있는 사이 나는 혼자 밖으로 나왔다.
파란 하늘아래, 까만 산을 등진, 어둠 덮힌 해수관음보살은 더욱더 위엄 있게 세상을 지켜보고 있었다.
시퍼런 하늘의 별들이 쏟아져내렸다.
습한 바닷바람과 차가운 산공기가 나를 감쌌다.
내 어깨에 남아있는 슬픔의 잿가루를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털어내고 싶었다.
난 그대로 무릎을 꿇고 앉았다.
누구에게라도 기도하고 싶었다.
욕망에 사로잡힌 부모를 벌하고 자식이 돌아간 그 하늘은 서슬 퍼렇게 차가왔다.
장남을 거둬가다,
출애굽기 11:5
이집트에서 처음 난 것은 왕위에 앉은 바로의 장남으로부터 맷돌질하는 여종의 장남까지 모조리 죽을 것이며 또 짐승의 처음 난 것도 다 죽을 것이다.
마지막 저녁을 얻어먹고 이진암을 떠나 집으로 출발했다.
선뜻 내어주신 선생님의 침상에서 몸을 쉬었고, 매 끼 정성껏 차려주신 밥상으로 메말랐던 마음을 달랬다.
선생님의 따뜻함에 마음속 깊이 담아둔 감정과 생각을 털어놓았다.
"남편을 서방정토에 잘 보내달라 바랩시다."
남편에 대한 미안함과 원망, 그리고 그리움이 한꺼번에 눈물과 함께 쏟아졌다.
그동안 '이 또한 지나간다' 같은 현답과 지혜로움으로 포장된 말들을 얼마나 많이 들었던가. 그리고 나는 또 얼마나 스스로를 포장하며 그런 말들로 마음을 꾹꾹 눌러 다졌는가.
그날 밤 난 무장해제 되어 선생님 앞에 날 것의 마음을 모두 쏟아냈다.
그렇게 가벼워진 마음으로 집에 돌아가는 차에 올라탔다.
4시간 여를 달려 밤 12시가 조금 넘은 시간 집에 도착했다.
세명의 아이들 모두 안 자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큰 놈이 씩 웃으며 묻는다.
"재미있었어?"
나도 웃으며 대답했다.
"응 재미있었어. 너네들도 재미있었어?
이제 아이들은 엄마가 없었던 이틀이 해방과 자유의 시간이었으리라.
거제도 사진을 함께 보며 이야기했다.
"내년 휴가에 다 같이 가자."
짐을 정리하고 짧은 잠을 취한 뒤 여독을 뿜으며 출근길 새벽을 맞았다.
아이들이 깰까 어둠 속에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여의도에 도착하니 수많은 이메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점심시간엔 배고픔 보단 피곤함을 달래야 바쁜 오후 미팅과 업무 스케쥴을 소화 할 수 있을 것 같아 식사 대신 휴식을 선택했다.
휴게실에 누워 눈을 감자 거제도 푸른 바다의 파도소리와 산나무의 벌레소리, 사찰의 풍정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휴대폰에 남아있는 거제도 사진을 둘러봤다.
잘 나온 사진 몇 장을 강사장님과 진주선생님께 보내드리며 모두가 공유하고 있을 피로에 대해 짧은 인사글을 올렸다.
휴대폰 사진첩에는 이진암 책장에서 뽑아 읽다가 간직하고 싶어 찍어둔 페이지들과 시문구들이 남아있었다.
울지 마. 사랑한 만큼 슬픈 거니까.
퇴근길에는 이진암에서 읽은 박노해 시인의 시구절과 진주샘의 따스함에 대한 여운을 잊지 못해 서점에 들러 시집 몇 권을 사 들고 왔다.
서점을 들려 집에 돌아오니 저녁밥시간이 이미 훌쩍 지났다.
점심도 거른상태라 몹시 배가 고팠다.
평소라면 대충 차려 허겁지겁 한 끼 때웠겠지만,
이진암에서 진주샘의 정성을 받아먹고 온 터라 구색이라도 갖춰 놓고 먹고 싶어졌다.
냉장고에 남아있는 반찬을 꺼내 하나씩 접시에 담아 상을 차리니 9시 가까이 되었다.
그래도 그럴듯한 저녁상이 차려지니 아이들과 둘러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먹게 되었다.
담겨있는 음식이 아니라 담아내는 상차림 자체가 따뜻한 만찬을 만드는 것을 오늘 알았다.
지난 몇 년간 여러 핑계로 제대로 밥상을 차리지 못했다.
남편의 병이 더 심해져 도와줘야 할 것이 늘어나고, 회사는 늦은 시간까지 일이 안 끝났다고, 소송으로 평일, 주말 밤낮없이 여유 없다며 대충 끼니를 때운 시간들이 너무 길었다.
나의 지친 몸만큼이나 아이들을 제대로 챙겨주지 못 한 미안함이 컸던 시절이 길었다.
고맙게도 아이들은 잘 자라주었다.
밥을 지어야겠다.
남은 아이들로 따뜻한 가족을 차려 두런두런 먹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