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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쥴 Oct 27. 2024

은빛 달이 출렁이면

스테로이드 펄스


그날 우리는 크게 싸웠다.


스테로이드가 고용량으로 투입되면서,

몸이 점점 무거워지고,

치밀어 오르는 식욕과 출렁거리는 감정을 절제하기 어려운 시기였다.


평소 같으면 맛없다며 고개를 돌리던 병원밥도,

잔반 없이 먹어치우던 너는,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와 네가 좋아하는 음식들이 차려진 저녁상을 보고, 잘 움직이지 못하던 다리까지 흔들며 즐거워하던 밤이었다.


저녁 식사를 마친 뒤,

문득 네가 좋아하던 따뜻한 Silver Moon 차를 내어줄까 생각이 들었다.

차 한잔 하겠냐고 묻자,

너는 반가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물을 끓였다.

찻잎에 뜨거운 물을 부으니 은은한 차 향이 금세 피어올라 주방을 채웠다.

원래는 네 것만 준비하려 했지만, 

차 향과 함께, 나도 한잔 마셔야겠다는 마음이 우러났다.


너에게 건네다 말고 무심코 네 잔에서 한 모금 마신 것이 화근이었다.


찻잔을 건네받은 너는, 따로 한잔 더 내릴 것이지 왜 뺏어 마시냐고 투덜거렸다.

가끔 라면 한 젓가락에 토라지던 너였지만,

그날은 유난히 크게 화를 냈고,

나도 그간의 병간과 지친 일상이 힘들어,

한 모금 마신 것이 이렇게 화낼일이냐며 네가 병을 얻은 뒤 잘하지 않던 대거리를 했다.


반복된 치료로 힘들었을 너에게,  

나는 어리석게도 내 고단함도 알아달라 떼를 썼다.


고용량의 스테로이드로 뜨거워진 너는,

'자기가 싫어하는 걸 뻔히 알면서, 일부러 약 올리고 있다며'며 더 불같이 화를 냈다.


잘 걷지도 못하는 너의 불안한 몸짓이 더 아프게 다가왔지만, 울음 섞인 투정들을 마저 다 쏟아 내며 쫓아 오는 너를 뒤로 하고 집밖으로 도망치듯 나왔다.


네가 보행워커를 끌고 현관으로 따라오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고,

화가 난 너의 손에서 무언가가 던져져 바닥에 떨어지는 둔탁하고 차가운 소리가 흘렀다.


어두운 밤,

단지 내 인적 드문 벤치에 혼자 앉아,

너의 괴로움과,

나의 고단함과,

나를 향해 던져진 것과,

아이들의 흔들리던 눈동자를 생각했다.


설움을 달래고 집으로 돌아오니,

너는 조용히 가라앉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들으니,

아빠가 워커를 끌고 현관으로 나와 쏟아진 소변통을 치우고 바닥을 묵묵히 닦아내었다고 한다.


이제,

나는 다시 차를 내리고,

찻잔 두 개에 나누어 담아 너의 옆에 앉겠다.


너와 차를 나눠마시며,

우리 큰 놈이 이번 진행한 행사가 뉴스에 나왔다니 함께 찾아보겠다.

내일은 막둥이가 그동안 연습해 온 연주를 학교 축제에서 선보인다니, 같이 가자 졸라 보겠다.

하루하루 더 예뻐지는 둘째에게, ‘화장하지 않은 얼굴이 제일 예쁘단다’고 아빠가 대신 한마디 해달라며 투정을 부려보겠다.


은빛 달이 떠오르면,

그 아래서 꼭 두 잔에 나눠 따라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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