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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쥴 Nov 03. 2024

여기에 있자

무간지옥



"내가 나이가 더 많으니 너보다 먼저 죽겠지? 나보다 먼저 가면 안 돼."

결혼을 앞두고 했던, 푸르렀던 시절의 우리 대화가 떠올랐다.

너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무 말이 없었지.


그러다가 몇 해 전 병실에서 너는,

"난 이제 이 세상 미련이 없어. 해보고 싶은 건 다 해본 것 같아"라며 나를 위로한답시고 말했어.


“나보다 먼저 가지 않겠다고 했잖아.”

눈물 가득해진 내 얼굴을 보며, 너는 잠깐 멈칫하더니,

그때 그 말이 생각났는지,

“그랬나?” 하고 머쓱하게 웃었어.


이 세상과 저세상의 경계는 어디일까.

내가 있는 이곳이 이승일까, 아니면 지옥일까.

찢어진 마음을 움켜잡고 무간을 헤매며, 차라리 끝이 오길 바라왔는데,


한 줌의 재로 남은 너에게 무슨 의미를 더할 수 있을까.

삶도, 이별도 결국 내가 혼자 짊어져야 할 몫으로 남겨졌다.


꾸역꾸역 산 나날들을 지나, 아이들이 모두 클 때까지 남은 몇 년, 내 할 도리하고 '펑'사라지겠다 다짐해 왔다.


너와의 연이 여기서 끝난 줄 알았다.


이제 너를 기억하는 이들의 마음속에 잠시 머물다, 언젠가 우리 모두가 사라지면 덧없이 흩어질 거라 여겼다.


앞으로는 네가 새롭게 만들어 가는 시간 없이, 그저 옛 이야기로만 남을 거라 생각했지.

유품을 정리하고, 사진들도 치워두면 너를 접어둘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런데 너를 꼭 빼닮은 아이들이 네 미소로 날 부르는 순간,

아무리 노력해도 너는 매일 내 눈앞에 나타나는 걸 알게 됐어.


이제는 옛 사진이 아니라, 오래된 흔적이 아니라, 아이들이 너의 살아있는 모습을 보여 준다.

아침마다 너를 닮은 아이들이 하나둘 일어나 학교에 가며 “잘 다녀오겠습니다”라고 나에게 입 맞춘다.

배고프다며 가방을 식탁 의자에 던져놓고,

차려진 밥상을 맛있게 퍼먹고,

소파에 누워 에어팟을 낀 채 잠들어있는 영락없는 너희들을,

남겨진 너희들을,

나는 매일,

지금 이 순간, 마주한다.


너희들은 여전히 매일 아침 빵바구니에서 마음에 드는 빵을 고르고,

다른 아이들은 잘 안 먹는다는, 네가 좋아하던 단호박을 냉큼 한 조각 입에 넣고,

김치냉장고에서 소고기 한 덩이를 찾아 꺼내며 미소 짓고,

닳아버린 운동화를 들고 와서 “새 운동화 사야겠어”라며 투덜대고,

시험이 끝났다며 “친구랑 놀다가 오늘은 좀 늦을 거야” 하고 흘깃 눈치를 보는 그 모습 그대로 내 옆에 남아있다.


여전히 손이 많이 가는 너희들은 집구석구석에서 네 흔적을 남기며 나와 부대끼겠지.


너에게는 아직 갈 수 없으니,

조금만 기다려 줘.

지금도 네게 듣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잠시 더 여기 머물러있자.


영락없는 너희들이 내 도움 없이 스스로의 삶을 잘 살아가게 되면,

너에게로 가서,

우리의 치열했던 삶을,

그때 쉬어보자.


그때까진 아이들과 함께,

여기에 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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