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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의 떨림 Feb 06. 2023

<이런 날 그림책> 불완전에서 완벽을 깨닫고 싶은 날

- 『앙통의 완벽한 수박밭』, 코린 로브라 비탈리 글, 마리옹 뒤밭 그림


<이런 날 그림책>의 '날'은 중의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어떠한 날(day)이나 경우를 의미하기도 하고 '나(나를, me)'라는 주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림책에 마음을 기대 울고 웃었던 날을 당신과 나누고 싶습니다.


***


완벽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마라 - 당신은 절대 그것에 도달할 수 없다

                            - 살바도르 달리 -



  누군가가 하는 이상한 행동 중 어떤 것은 너무나 잘 알 때가 있다. 굳이 그 이유를 듣지 않아도, 애써 이해하려 하지 않아도 그가 왜 저렇게 미련을 떨고 있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그럴 때면 그의 등을 토닥이며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가도 왜 그렇게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느냐며 한껏 비난을 퍼부어 주고 싶기도 하다.


  '앙통의 완벽한 수박밭'이라는 제목을 본 순간, 분명 앙통이 완벽이라는 허상에 빠져 자신을 들볶으리라 예상했다. 완벽이 얼마나 허구인지, 그게 얼마나 사람을 불완전하게 만드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앙통의 고군분투가 그려졌다. 거대한 수박 앞에서 미소를 짓는 앙통을 보면서 언젠가는 저 수박이 앙통의 몸을 짓누르리라 장담했다. '완벽'이라는 매력적이면서 괴로운 단어가 앙통을 어떻게 만들지 살짝 기대도 됐다. 힘들어하는 앙통을 보면서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심술궂은 위안을 얻고 싶었다. 무엇보다 표지의 그림이 따뜻하고 부드러워서 완벽이라는 고통 속에서 평온함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앞표지의 바탕색은 잘 익은 수박 과육 같다. 물기를 가득 담아 한 입 베어 물면 달콤함이 배어 나올 듯하다. 이런 배경 속에 한 남자가 서 있다. 아마 그가 앙통일 것이다. 그는 경의를 표하듯 모자를 벗고 자신 앞에 있는 수박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남자의 뺨도, 상의를 입지 않아 드러난 남자의 팔뚝도 수박처럼 발그스름하다. 초록색에 검은색 무늬가 있는 바지는 수박을 닮았다. 그가 얼마나 수박에 진심인지 느껴진다. 반만 드러난 수박은 남자보다 훨씬 크다. 수박 위에서 꼬리를 치켜 세운 고양이 한 마리가 이 거대한 수박을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뒤표지는 전체가 수박껍질의 일부이다. 밝은 연두색 바탕에 명암이 다른 초록색 무늬가 기괴하기까지 하다. 가만히 보고 있으니 수박껍질의 무늬가 반듯한 줄무늬가 아니었음을 새삼 깨닫는다.


  면지는 앞표지의 바탕색보다 훨씬 진한 분홍색이다. 한 장을 넘기니 수박 한 통이, 또 한 장을 넘기니 앞 장에 있던 수박의 꼭지와 이어진 줄기와 이파리가 보인다. 초록의 줄기와 잎이 춤을 추 듯 흔들린다. 하얀 여백 덕에 초록의 싱그러움이 더 강하게 다가온다. 속표지를 지나니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본문의 첫 그림은 수박밭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 밭 가운데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고 있는 남자가 보인다. 그가 앙통이다. 해는 뜨겁게 내리쬐고, 앙통의 살은 햇빛에 붉게 그을리고, 간격을 맞춰 가지런히 늘어선 수박들은 탐스럽고 싱싱하게 익어간다. 수박밭 주변에는 풀이 있지만 조금도 풍성하지 않다. 앙상한 나무 한 그루 덕에 황량한 모래밭과 그보다 더 삭막한 산이 돋보인다. 이런 척박한 환경에서 앙통이 얼마나 애썼을지 짐작이 간다. 그는 자신보다 훨씬 수박밭을 아끼고 돌봤을 것이다. 자신의 몸이 빨갛게 익을수록 수박이 잘 익어간다고 기뻐했을 것이고, 맨발에 상처가 나서 굳은 살이 박여도 일을 하는데 거추장스럽다며 신발을 신지 않았을 것이다. 앙통의 성실함 덕에 수박밭은 완벽했다. 그런데 누군가 수박 한 통을 훔쳐갔다. 하나가 사라졌을 뿐인데 앙통은 그 빈자리를 볼 때마다 수박밭 절반이 사라진 것 같은 슬픔과 절망을 느낀다. 그의 시선은 오직 수박이 있었던 빈자리에만 머물고, 점점 그 공간이 커진다. 앙통의 머릿속에는 온통 도둑맞은 수박밖에 없다. 그 수박은 다른 수박보다 훨씬 달콤하고, 탐스럽고, 완벽했을 테니까. 수박에 대한 집착은 수박을 도둑맞는 악몽으로 이어진다. 더는 당할 수 없다며 앙통은 잠을 포기하고 밤새 수박밭을 지키기로 결심한다.





  수박에 대한 집착과 또다시 수박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앙통을 미련하게 한다. 어두운 수박밭에서 어떤 위험과 마주할지 모르는데 그는 여전히 상의를 입지 않고,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맨살을 드러내고 있다. 도둑을 쫓기 위한 도구나 무기도 없이 홀로 드넓은 수박밭 한가운데에 앉아있을 뿐이다. 밤새 밭을 지키기 위해서는 편안하고 튼튼한 의자를 갖고 와야 하는데 그가 들고 온 의자는 전혀 그렇지 않다. 등받이가 없는 의자는 앙통의 엉덩이보다 작고, 의자의 다리는 앙통의 덩치를 감당하기에는 너무 부실하다. 의자를 꼭 붙잡고 앉아 있는 앙통을 통해 그의 상황과 심리가 얼마나 불안하고 위태로운지 알 수 있다.


  절판되었던 『앙통의 완벽한 수박밭』을 그림책공작소에서 복간했다. 24절기 중 '더위가 가장 심한 때'라는 대서에 맞춰 출간했다. 정글짐북스에서 나온 그림책보다 판형이 줄었고, 글씨체와 디자인도 달리 했다. 기존의 한국어판은 구어체이면서 경어체였를 사용했다면 복간한 책은 문어체이면서 평어체다. 절판된 책이 다정하고 감성적인 문체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면 복간한 책은 담백하고 건조하게 설명하고 있다.



  앙통의 수박밭은 완벽했어요.
  도둑맞은 수박 한 통이 있던 자리만 빼면요.
  그 빈자리 하나 때문에 수박밭은 이가 하나 빠진 듯 보였어요.

  가지런히 늘어선 수박들은 엄청 크고 매끈하고 실했어요.
  그러나 앙통의 머릿속엔 온통 그 도둑맞은 수박 생각뿐이었답니다.
  앙통은 그 수박이 자꾸만 떠올라 허전한 마음이 들었어요.

- 『앙통의 완벽한 수박밭』, 박선주 옮김, 정글짐북스 펴냄 -


  앙통의 수박밭은 완벽했다.
  누군가 수박 한 통을 훔쳐가기 전까지는 말이다.
  앙통은 그 빈자리를 볼 때마다 수박밭 절반이 사라진 것만 같았다.  

  가지런히 늘어선 수박들은 검푸르고 아주 싱그러웠다.
  그렇지만 앙통의 시선은 도둑맞은 수박의 빈자리에만 머물렀다.  

- 『앙통의 완벽한 수박밭』, 이하나 옮김, 그림책공작소 펴냄 -




  그림은 글의 내용을 명료하게 보여주거나, 글에서 설명하지 않는 더 많은 이야기를 상상하고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수박에서 과즙이 흘러나오는 그림은 앙통이 피눈물을 흘리는 듯한 인상을 주고, 앙통보다 압도적으로 큰 수박은 그에게 이것이 얼마나 무겁고 중요한 의미인지 알 수 있게 해 준다. 상의와 신발을 착용하지 않은 앙통을 통해 그가 오로지 일하는 데에만 신경을 쓰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앙통이 살고 있는 공간을 보면 그가 왜 수박밭에 집착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삭막한 모래밭과 끝없이 이어진 낮은 산등성이가 대부분인 이곳에는 풀밭이 있긴 하지만 엉성하다. 나무도 한 그루뿐이다. 이 황량한 지역에 덩그러니 앙통의 집만 있다. 다른 집도,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이런 환경에서 앙통이 찾을 수 있는 재미는 완벽한 수박밭을 만드는 것 외에는 없었을 것이다. 그동안은 별 탈 없이 순조롭게 일이 진행되었는지 문제가 발생하자 앙통은 유아적인 감정에 빠져 미숙하게 대처한다. 표지에서 보았던, 군림하 듯 거대한 수박 위에 있던 고양이의 역할은 이야기가 마지막으로 향해 갈 때 알 수 있다. 수박밭을 더없이 완벽하게 만들고, 앙통을 성숙하게 한 무리 중 한 녀석이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앙통의 완벽한 수박밭』의 문체는 담백하고 건조하다. 하지만 글의 느낌과 달리 그림은 따뜻하고 부드럽고 익살스럽다. 덕분에 절망과 상실감에 빠져 고통스러워하는 앙통의 이야기가 무겁지 않다. 오히려 앙통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자꾸만 웃게 한다.  






  완벽하고 싶어 불안했고, 완벽하지 못해 절망했던 날이 있었다. 그것이 신기루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완벽이라는 벽을 넘을 수 있다고 믿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그때의 내가 생각이 나서 웃었고, 여전히 그러고 있는 나 때문에 씁쓸했다. 앙통의 고군분투를 응원하면서도, 그런 모습에 한숨이 나오는 건 앙통이 나와 같기 때문이다. 그래도 앙통은 성실하게 자신의 수박밭을 지키고자 했는데 지금의 나는 뭘 하고 있나, 반성한다. 앙통은 완벽을 새롭게 바라보며, 엉망진창이 된 수박밭에서 깨달음을 얻었는데 여전히 나는 그 허상에 닿고 싶어 한다. 


  뭐든 다 잘하고 싶고, 완벽하고 싶어 안달인 당신에게 이 그림책을 건넨다. 당신도 앙통처럼 망가진 수박밭에서 생기를 발견하고, 불완전 안에서 완벽을 깨달을 수 있다고 덧붙인다. 이번에도 당신을 빌려 나에게 말하는 중이다.



* 『앙통의 완벽한 수박밭』, 코린 로브라 비탈리 글, 마리옹 뒤밭 그림, 이하나 옮김, 그림책공작소 펴냄

* 『앙통의 완벽한 수박밭』, 코린 로브라 비탈리 글, 마리옹 뒤밭 그림, 박선주 옮김, 정글짐북스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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