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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의 떨림 Sep 06. 2021

<그래, 감사한 날> 불행이 나만 피해갈 리 없지

  

<이런 날 그림책>의 '날'은 중의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어떠한 날(day)이나 경우를 의미하기도 하고 '나(나를, me)'라는 주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림책에 마음을 기대 울고 웃었던 기억을 당신과 나누고 싶습니다.





  오늘은 이런 날이다. 뭐지, 싶은 일이 연속으로 일어나면서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날.


  아침 9시쯤 냉장고 문을 열다가 왼쪽 눈을 다쳤다. 어이없게도 냉장고 문에 얼굴을 댄 채 문을 열었고, 그 때문에 문이 안경을 쳤고, 안경 코받침이 왼쪽 눈을 찔렀다. 시야가 흐릿하더니 눈이 욱신거렸다. 잠시 눈을 감고 있으면 될 줄 알았는데 느낌이 좋지 않았다. 오후 1시에 일이 있는데 그때까지는 괜찮겠지, 기대하면서도 내심 불안했다. 3시쯤 일이 끝나면 그 후에 안과를 가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눈물과 콧물이 멈추지 않자 그럴 수 없었다. 대략 시간을 계산해보니 안과에 갔다가 일하러 갈 수 있을 듯했다.    


  처음 만나는 이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어 마스카라로 눈썹을 올리고, 오랜만에 파운데이션도 바르려고 했는데 머리를 감는 것도 고민이었다. 오른쪽만 렌즈를 끼고 화장을 할까 했는데 눈이 불편하니 그런 마음이 사라졌다. 몸이 아파 오늘은 쉬겠다고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밖으로 나가자 눈이 더 시렸다. 안과로 가는 버스 안에서 티슈로 눈물을 닦으면서 슬퍼서 우는 게 아니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는데도 사연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까 괜한 걱정을 했다. 그나마 날이 흐려서 다행이었다. 어제처럼 햇빛이 강하면 눈을 뜨기 힘들었을 것이다. 콧물을 닦고 싶었는데 버스 안이라 마스크를 벗을 수 없었다. 마스크 안이 축축했지만 눈에 가해지는 통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왼쪽 시야는 계속 흐렸고, 눈이 불편하니 피로가 몰려왔다.


  평상시보다 안과에 사람이 많지 않았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지는 않았는데 검사실을 몇 군데나 가야 했다. 눈을 뜨기 힘든 탓에 빛이 번쩍일 때면 눈을 감았다. 눈동자를 찍어야 하는데 눈꺼풀만 나왔다는 소리를 몇 번이나 들었다. 눈물과 콧물에 이어 땀까지 났다. 짧은 시간 동안 죄송합니다와 감사합니다를 참 많이도 했다.


  각막이 찢어졌단다. 눈을 보호하는 렌즈를 삽입하고, 약을 발랐다. 여유롭게 일하는 곳에 갈 줄 알았는데 수납을 하고 약국에 가서 약을 받으니 여유롭지가 않았다. 발을 동동 구를 정도는 아니었지만 5분 내에 택시를 잡지 못하면 곧 속이 타들어갈 것이다. 택시를 부를 어플을 켰지만 조작이 익숙하지 않자 꺼버렸다. 몇 번 시도하면 될 텐데 눈이 피로하니 그러고 싶지 않았다. 번화가이니 지나가는 택시가 많을 거라 기대하며 버스 정류장을 피해 걸었다. 흐릿한 시야 때문에 어지러웠다.


  어찌어찌 일이 끝났다. 컴퓨터 모니터 속 PPT자료가 또렷하게 보이지 않았지만, 평상시보다 잠잠한 반응에 김이 빠지긴 했지만, 상대방과 살짝 어긋난 느낌이 들었지만 그래도 끝났다. 밖으로 나오니 비가 한두 방울 떨어졌다. 날이 흐렸던 게 비가 올 조짐이었는데 몸이 아프니 그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저 해가 쨍쨍하지 않아 다행이라 여겼다. 몇 번 지나다닌 길이라 이쪽으로 가면 버스정류장이 나올 거라 예상했는데 기억은 자꾸만 오류를 일으켰다. 왼쪽 눈을 감았다 뜨면서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다니는 게 얼마나 감사하고 대단한 일인지  새삼 느꼈다.


  버스에서 내릴 때만 해도 이 정도는 맞을 수 있겠다 싶었는데 반찬가게에 들렸다 나오자 후드득 비가 쏟아졌다. 비가 그치길 기다렸지만 아무래도 쉽게 그칠 것 같지 않았다. 편의점에서 우산을 고르고, 빵도 하나 샀다. 그 짧은 사이에 비가 확 줄었다. 억지로 먹을 게 뻔한 고등어조림과 불필요해진 우산을 보자 그 무게가 버거워졌다.


  슬랩스틱 코미디도 아니고 대체 왜 냉장고 문 가장자리에 얼굴을 갖다 대고 문을 연 건지 어이가 없었다. 이런 일이 생기려고 그런 거였다는 체념에 빠지자 집으로 가는 길이 너무 멀게 느껴졌다. 오늘 같은 날 더 조심해야 한다는 강박이 들자 횡단보도 앞에서 차가 오는지 확인하고 망설이기를 반복했다. 계단을 내려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집에 빨리 가고 싶을수록 걸음이 느려졌다. 며칠 전부터  집에서도 몇 번이나 미끄러져 넘어질 뻔하고, 조심하라는 소리를 계속 듣더니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다.



  한때는 세상이 행복으로 가득 차 보였지.
  사탕을 고를 때 제일 맛있는 맛만 내게 올 것 같고 말이야.

  어느 날 불행이 생각보다
  가까이 있다는 걸 알게 돼.

  생각보다 불행은 자주 예상치 못하게

  상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어느 때나 어느 순간이나 어느 장소에서나
 
  만나게 돼.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위태롭게 걷다가 불현듯 그림책 『불행이 나만 피해갈 리 없지』가 떠올랐다. 주인공은 아침에 일어날 때부터 기분이 좋지 않다. 불길한 예감처럼 집을 나서자마자 현관에서 넘어지고, 길에 버려진 껌을 밟는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화분이 눈앞에서 떨어지더니 새똥까지 맞는다. 이젠 그만 하면 좋으련만 주인공에게 불행은 계속 이어진다. 안 그래도 삶이 퍽퍽한데 원하는 일은 되지 않고, 혼자만 버려진 기분이다. 안타깝고 안쓰럽고 위태로운 상황이지만 그래도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건 불행이 나만 피해갈 리 없는 것처럼 행운도 나만 피해갈 리 없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오늘 나는 각막이 찢어졌고, 원하는 만큼의 성과를 얻지 못했고, 비를 맞은 채 정류장을 찾아 헤맸고, 또렷하게 세상을 볼 수 없어 불편과 위험을 감수해야 했고, 교통카드가 말썽을 부려 버스기사와 승객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면서 민망한 시간을 견뎌야 했다. 그런데 불행하지만은 않았다.


   눈을 다쳤지만 일을 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하지는 않았다. 낮에 여유가 있었기에 안과에 갈 수 있었고, 늦을까 걱정했지만 원하는 시간에 일하는 곳에 도착했다. 욕심만큼의 성과는 없었지만 그럭저럭 나쁘지 않게 일도 잘 마쳤다. 교통카드가 말썽을 부려 금방 내릴 수 없는 나를 버스기사와 승객은 너그럽게 기다려주었고, 몇 번의 고비는 있었지만 그래도 무사히 집에 잘 도착했다. 조의 배려로 저녁식사를 차리지 않아 여유를 부릴 수도 있었다.


  글을 쓸 때만 해도 미안하고 민망하고 어이가 없어서 웃었는데 지금은 편안한 웃음이 나온다.  '그래도 감사하다'라고 중얼거리다가 '그래도'를 삭제한다.


  덕분에 아무것도 아닌 줄 알았던 일상이 얼마나 대단한지 다시 또 느낀다. 부디 이번에는 이 새삼스러운 깨달음이 오래갔으면 좋겠다.


  눈이 계속 아프면 어쩌지, 하는 불안도 잠시 내려놓는다.



* 불행이 나만 피해갈 리 없지, 정미진 글, 김소라 그림, atnoonbooks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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