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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의 떨림 Jul 11. 2023

 <이런 날 그림책> 다양한 나를 발견하는 날

『단정한 마을의 단정한 시쿠리니 씨』, 안드레아 안티노리 그림


  《어벤저스》의 첫 시리즈에서 어벤저스 팀은 서로를 불신하며 갈등을 겪는다. 말다툼 중 캡틴 아메리카가 아이언맨에게 "강철 슈트, 그걸 벗으면 뭐지?"라고 하자 아이언맨은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이렇게 말한다. "천재, 억만장자, 플레이보이, 자선가."


  캡틴 아메리카는 강철 슈트를 입어야만 아이언맨이 되는 토니 스타크에게 그것 없이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라며 저격한 건데 토니 스타크는 타격을 받지 않는다. 그는 아이언맨이 아니어도 자기에게는 다른 역할과 특징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는 세계 최고 군수산업체의 CEO이고,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로 엄청난 것들을 발명하고 있으며, 막대한 부와 매력으로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데다가, 어떤 사건을 계기로 인간애와 희생정신을 깨닫는다. 그는 자신의 다양한 역할과 면모를 알고 있고, 그 각각에 만족하며 충실하기에 강철 슈트가 사라진다고 해서 자신이 무너지는 게 아님을 알고 있다. 그러니 타인이 뭐라 하든 자존감을 지킬 수 있다.


  토니 스타크처럼 우리도 하나의 역할과 특징만 있는 게 아니다. 만약 당신이 교사라면 학생을 가르치는 일만 하지 않는다. 학생과 학부모 상담뿐 아니라 학교에는 처리해야 할 행정업무가 엄청 많다. 돌봐야 하는 가족이 있을 수 있고, 대부분의 집안일을 도맡아 할 수도 있다. 취미생활을 즐기고, 무언가를 배우고, 누군가에게는 기대면서 누군가에게는 보호자 역할을 하기도 한다. 어디에서는 활발하지만 어디에서는 과묵하다. 상냥하고 친절한 사람이지만 매번 너그러울 수는 없다. 누군가에게는 별일 아닌 일로 화를 내지만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관대하기도 하다. 『단정한 마을의 단정한 시쿠리니 씨』는 우리 모두는 다양한 역할과 특징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니 하나로만 단정 짓지 말고, 타인에 의해 자신을 규정하지도 말라고 한다.



 



  '단정한'이 두 번이나 들어가는 제목을 읽다 보면 '단정하다'라는 단어가 새로워진다. 침착하고, 얌전하고, 바르고, 점잖고, 꼼꼼하고, 단아하다는 인상과 함께 어딘지 막혀 있고, 답답하고, 갑갑하고, 재미없고, 따분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표지에는 일반적이지 않은 모습의 캐릭터가 꼿꼿하게 서서 제각각의 표정을 짓고 있다. 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이 마을과 시쿠리니 씨의 단정함은 어떤 쪽에 가까운지 궁금해진다.


  시쿠리니 씨는 로카페르페타 마을에 살고 있다. 이 마을의 주민이 되려면 등기소에 등록을 해야 한다. 등기부에 이름이 없으면 있어도 없는 사람이다. 등기소의 유일한 직원이면서 소장인 시쿠리니 씨가 등록부에 이름을 올리고 등록증을 발급해 줘야 드디어 '있는 사람'이 된다. 지나칠 정도로 꼼꼼하고, 무게를 잡고 싶어 일부러 까다롭게 구는 시쿠리니 씨의 성격과 잘 맞는 직업이다. 시쿠리니 씨는 등록증을 발급해 주기 위해 질문을 퍼붓는다. 그리고는 양식을 채워라, 서류를 작성하라고 요구한 후에 자기 마음대로 그들을 하나의 역할로 정의해 등록증을 발급한다. 에벨리나 아주머니는 청소부로, 마리오는 오븐에 감자를 굽는 사람으로, 루치아는 고슴도치 지킴이로, 굴레일모는 양말 수선공으로, 잔니는 참견쟁이로 등록부에 이름을 올린다. 그들은 이것 말고도 아주 많은 일을 하지만 시쿠리니 씨 마음대로 정한 이름에 불만을 품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느 날, 내맘대로 초등학교 2학년 2반 친구들이 시청 등기소로 몰려온다. 12명의 학생 중에는 등기부에 이름이 있는 친구가 아무도 없다. 그러니 그들은 있어도 없는 사람들이다. 아이들은 등록증을 받기 위해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말한다. 병뚜껑을 수집하는 마태오, 사촌이 열두 명이나 있는 아델레, 반에서 제일 키가 큰 안드레아, 목이 아픈 자코모, 아이들이 발음을 잘못하면 고쳐 주는 아멜리아, 수염을 잘 그리는 도메니코 덕에 시쿠리니 씨는 정신이 없다. 시쿠리니 씨는 아이들 때문에 엉망이 된 일상을 정리하느라 바쁘다. 등록증을 휘갈겨 쓰고, 아이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소리를 지르고, 책상을 정리하고, 도장을 찍고, 서류를 작성하고, 어지럽게 널린 물건을 정리하고, 액자가 떨어지지 않게 몸을 날리며 오전을 보낸다. 다음 날, 내맘대로 초등학교 친구들이 시쿠리니 씨 사무실에 또 찾아온다. 병뚜껑을 수집한다던 마태오는 이번에는 부메랑을 잘 던진다고 한다. 아멜리아는 이번 주 반장이고, 자코모는 이제 목이 안 아프고, 아델레는 책을 잘 읽는단다. 아이들에게 다시 등록증을 만들어주는 시쿠리니 씨는 이번에도 정신이 하나도 없다. 다음 날 또 찾아온 내맘대로 초등학교 2학년 2반 친구들의 손에는 색종이가 가득하다. 자기가 누구인지, 무엇을 잘하는지 써서 갖고 온 것이다. 아이들은 자신의 등록증이 더 많다며 목소리를 높인다. 57개나 된다며 자랑하는 아이도 있다. 아이들은 자기들이 모아 온 등록증에 서명을 해달라고 시쿠리니 씨를 재촉한다. 사십 년 동안 근무한 모범 공무원이면서 등기소에서 제일 높은 자리에 있는 시쿠리니 씨는 은퇴를 앞두고 큰 위기를 맞는다.  





  로카페르페타 마을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를 타인에게 증명받아야 한다. 등록증이 없으면 있어도 없는 사람일 뿐이다. 그림은 등록 전과 등록 후를 비교해서 보여준다. 등록 전에는 회색의 선들로만 이루어그림자이지만 시쿠리니 씨가 등록증을 건네는 순간부터 모습을 갖게 된다. 마을 사람들은 인간의 모습만 하고 있지 않다. 바다생물도 있고, 인어도 있고, 재미있는 모양의 생명체도 있다. 이들은 모두 개성 있는 생김새를 갖고 있고, 다양한 역할과 성격을 갖고 있지만 이 마을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마리오는 '오븐에 감자 굽는 사람'만은 아닐 텐데 그는 그런 사람이 되어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 타인에 의해 짧은 한 줄로 자신이 정의되는데도 이들은 불만이 없다. 권위에 맞서지 않고 주어진 대로 살아가는 사람들만 있는 마을에 내맘대로 초등학생 아이들은 희망이다. 그들은 자신의 강점과 특징이 무엇인지 알고, 다양한 취미를 갖고 있으며, 목이 아프다는 사실도 숨기지 않고 말한다. 타인에게 자신의 가치를 맡기지 않고, 스스로를 알리면서, 자신의 다양한 면을 받아들인다. 등록증이 없기에 '있어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던 아이들이 단정한 마을의 틀을 깨뜨리며 그들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있는데 없는 사람이 된 듯한 느낌이 든다. 원하는 일에서 성과를 내지 못하면 인생 자체가 실패했다는 좌절감에 빠진다. 그냥 이 일을 잘 해내지 못했을 뿐인데 나의 모든 능력이 의심되고, 존재의 이유는 사라진다. 나의 가치를 타인에게 맡기고, 하나의 역할에만 몰두하기에 생기는 문제다. 자신의 다채로운 면을 발견하면서 나와 타인의 다양성을 받아들인다면 상처받을 일은 줄고, 재미있는 일은 많아질 것이다. 토니 스타크처럼 천재에 억만장자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충분히 괜찮고 매력적이다. 그것만으로도 예상보다 훨씬 많은 등록증을 만들 수 있다.  



 * 『단정한 마을의 단정한 시쿠리니 씨』, 크리스티나 벨레로 글, 안드레아 안티노리 그림, 김지우 옮김, 단추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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