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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의 떨림 Dec 28. 2020

<시작을 응원하는 날> 태어난 아이

- 자기 서사를 쓰고 있는 나와 당신에게

  

<이런 날 그림책>의 '날'은 중의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어떠한 날(day)이나 경우를 의미하기도 하고 '나(나를, me)'라는 주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림책에 마음을 기대 울고 웃었던 기억을 당신과 나누고 싶습니다.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지금 우리는 다시 태어나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하는. 그게 후회와 미련을 상쇄하기 위한 선택이었든, 지난날에 대한 참회였든, 이번에는 다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였든 뭐라도 시작하고 싶어 삶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했다.


태어나긴 했는데 말을 할 수 없고,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 이전의 삶을 다 기억하는데 새로운 삶을 받아들이란다. 낯선 이들이 가족이라 하는데 마음에 들기도 하고, 이번 생은 망했다는 불길함도 든다. 포기할 건 포기하고 받아들일 건 받아들일 즈음 언어를 입 밖으로 낼 수 있다. 그러면서 지난날을 잊는다. '엄마'를 발음하면서 과거의 엄마를 잊고, '물'을 발음하면서 물과 관련된 일들이 사라진다. 단어와 문장을 표현하면서 이전의 삶은 날아가고 지금의 삶만이 존재한다.


이런 상상을 하다가 나는 왜 삶을 택했는지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몇 개의 사건을 만들고 지우면서  『태어난 아이』의  태어나지 않은 아이처럼 '온전히 느끼고 싶어서'라고 결론을 내렸다.



태어나고 싶지 않아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별에 부딪쳐도 아프지 않다. 태양 가까이 가도 뜨겁지 않다. 사자가 무섭지 않고, 구수한 빵 냄새가 나도 먹고 싶지 않다. 태어나지 않았으니 아무 상관이 없다.


그 어디에도 무게 두지 않고, 감정을 섞고 싶지 않았던 나는 이 장면들이 좋았다. 두려움도, 고통도, 아픔도 없는 삶을 지향하던 내게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부러움 그 자체였다. 태어나고 싶지 않아 태어나지 않았다는 자기 주도적인 태도 역시 마음에 들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상관없다는 시큰둥한 아이의 표정에 대리만족까지 느꼈다. 그랬는데 그 아이가 태어나겠다고 결심한다. 태어난 여자 아이 엉덩이에 붙어 있는 반창고가 탐나서 그런단다. 아이의 선택을 존중하고 싶었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강아지에게 물려 우는 여자 아이가 왜 부러운지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 당시 나는 나를 태어나게 한 부모를 원망하면서 내일은 눈을 뜨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고 바랐다. 순응하면서 냉소적이었고, 친해지고 싶으면서 그들을 미워했다. 오늘 있을 회의 시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조마조마했고,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업무와 아끼고 아껴도 불어나는 카드빚에 막막했다. 꿈은 이뤄지지 않았고, 넘어질 때마다 상실감과 열등감이 자랐다. 그랬기에 태어나겠다는 아이를 말리고 싶었다. 모든 엄마가 우는 자식을 매번 다정하게 달래주지 않는다고 알려주고 싶었다. 태어나면 강아지에게 물린 상처쯤은 아무것도 아닐 만큼 고통스러운 일이 많다는 사실도 말하고 싶었다. 반창고로는 어림없는 일들이 수두룩하다고 깨우쳐주고 싶었다.


고통도, 욕망도, 감정도 느끼지 않는 그 아이가 마지막까지 태어나지 않은 채 그대로 있어주길 바랐지만 제목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결말을 예상했으면서 기대와 바람을 무너지게 했다며 한동안 이 책을 펼치지 않았다.



오래전에 일하던 곳에서 30대 언니가 사랑 때문에 아프다며 울었다. 결혼해서 초등학생 아이가 있는 40대 언니가 30대 언니를 위로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남자 때문에 우는 네가 나는 왜 이렇게 부럽니. 20대였던 나는 그 말이 와 닿지 않았다.


사랑 때문에 아프고 싶다던 말을 이해하면서 이 아이가 태어나려 했는지도 이해했다. 여자 아이 엉덩이에 붙은 반창고는 상처의 흔적이 아니었다. 사랑과 위로와 치유의 증표였다. 아팠기에 사랑을 느낄 수 있었고, 아팠기에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상처가 났기에 아물 수 있었고, 새살이 돋아날 수 있었다. 고통을 받아들여야 그 뒤에 행복이 온다는 사실을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알고 있었다.


반창고를 붙이고 싶어 태어난 아이는 이제 배고픔을 느끼고, 간지러워하고, 아파한다. 덕분에 사랑도 배우고, 자부심도 갖는다. 내 반창고가 더 크다며 자랑하다가도, 태어나는 건 피곤한 일이라 중얼거린다. 그렇게 아이는 매 순간을 오롯이 느끼면서 성장하는 중이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 했지만 기억을 하지 못할 뿐, 어쩌면 우리는 삶을 선택했을 수 있다. 나라와 인종과 가족과 생김새와 능력 등을 고를 수는 없었지 태어나고 싶어 태어났을 수 있다. 지긋지긋하지만 한 번 더 아파보고 싶고 한 번 더 울어보고 싶지는 않았는지, 좋은 환경에서 편안하게 살 확률이 희박하다 해도 무미건조한 날보다 모험이 낫다고 판단하지는 않았는지 그려 본다. 그게 아니더라도 상관없다. 뜻하지 않게 세상에 던져졌어도 지금부터 존재의 의미를 만들면 된다.


그동안 내 의지대로 태어난 게 아니라며 끝도 없이 원망하고 원망했다. 당신이 붙여준 반창고를 떼어내며 상처를 후비고 또 후비고는 다시 반창고를 붙여달라 졸랐다. 당신이 지친 이유를 나에게서 찾지 않고 당신 탓만 했다. 아물지 않은 딱지를 기어코 뜯어 다시 피를 나게 했으면서 그게 나는 아니라고 했다.


그림책에 기대 나의 이야기를 하는 동안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순간순간 무슨 감정을 느꼈는지 알게 됐다. 그림책을 통해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이야기를 풀면서 나뿐 아니라  내 옆에 있는 이들도 헤아릴 수 있었다. 아직 털어놓지 못한 일들이 있지만, 나의 못난 부분을 다 받아들이지는 못했지만 조금씩이라도 끄집어내면서 인정하는 중이다. 이제 슬슬 이 이야기도 마무리를 지어야 할 때가 온 듯하다.  


끝을 향한 시작 앞에서 그냥 이 말을 하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부터 다시 태어나는 것을 선택하면 된다고. 기억을 간직한 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고.  상처가 나도 괜찮으니 넘어지고 엎어지라고. 기쁨도 슬픔도 고통도 행복도 온전히 느끼고 누리라고. 사는 건 피곤하고 쓰리지만 회복하는 과정에서 달콤해진다고. 반창고 하나쯤은 갖고 태어났으니 안심하라고. 그냥 이 말을  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당신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었다. 덕분에 가능했습니다, 이제 저도 당신의 서사를 기다리고 기대하겠습니다.


자기 서사란 자기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의식적 활동이자 다양한 방식의 자기 존재의 표현이다. 하고 싶을 때 하고 하기 싫을 때 하지 않는 자기 서사란 없다. 자기 서사는 내가 쓰는 나의 삶의 역사이고 그 역사는 멈추지 않는, 지금 여기라는 실존적 의식의 흔적들이다.  

- 실존주의자들에게 인생의 즐거움을 묻다, 이하준 지음, 책읽는수요일 펴냄 -  



* 세상에 태어난 아이, 사노 요코 지음, 임은정 옮김, 프로메테우스 펴냄

* 태어난 아이, 사노 요코 지음, 황진희 옮김, 거북이북스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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