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몫이다. 답은 정녕 그것뿐인가?
“매번 담당자가 바뀌어서 업무 처리 절차를 몰랐다고 하시니 답답하네요.”
내가 인사 업무를 담당하기 전까지 전임자 여럿이 자리를 옮겼다. 회사 내 다른 부서로 옮겨간 사람도 있었고 지방 발령이 난 사람도 있었다. 단기간에 여러 차례 인수인계가 이루어지다 보니 전달된 것보다 누락 된 것이 많았다.
그중에는 감독기관에 정기적으로 신고해야 하는 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전임자는 깜빡하고 해당 업무를 알려주지 않았고, 나는 감독기관의 질책 전화를 받아야 했다. 자꾸 담당자가 바뀌어 어쩔 수 없다고 항변 해 보았다. 담당 공무원은 회사 내부의 사정이라며 고려해 줄 수 있는 사항이 아니라고 했다. 게다가 이전에 전임 담당자들이 했던 실수까지 포함해 우리 회사와 나에게 징계를 주겠다고 호통쳤다. 결국은 담당 임원이 찾아가서 앞으로 성실 신고를 하겠다고 다짐을 하는 정도로 간신히 마무리되었다.
우리나라의 조직은 유독 순환 근무를 좋아한다. 적당한 때에 직무 전환이 되어야만 직원이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자꾸 변화를 경험해야 유연성과 적응력이 높아진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다양한 직무를 경험한 후에 팀장이 되고 임원이 되는 길이 최적의 경력이라고 여겨왔다.
순환 근무는 공무원 조직에 더 깊이 뿌리내려 있다. 왜 이렇게 담당자가 많이 바뀌냐고 기업을 탓하지만, 관계기관의 공무원들 또한 자주 바뀐다. 대부분 정기 인사 시즌이 되면 예외 없이 담당자가 변경되었다. 한 공무원 친구는 이런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한다.
“순환 근무는 전임자가 만들어놓은 문제를 깨끗하게 덮고 새로 시작하기에 좋아. 다 전임자의 책임이고, 저는 잘 모르겠다는 말로 누적된 업무 실수를 끊어버리는 셈이지. 장기간 미해결된 문제를 한 번에 털어버리기에 이보다 좋은 방법이 있을까 싶다.”
그동안 국내 기업에서만 일하다 보니 순환 근무 인사가 당연하다고 여겼다. 어느 날 해외의 인사 제도를 접하고부터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다수의 나라에서는 일정한 시간이 흘렀다는 이유만으로 부서나 업무를 바꾸지는 않는다.
미국의 직무 중심의 인사 관리를 한다. 딱 그 직무에 맞는 사람을 뽑고, 직무에 적합하게 일을 하는지 평가한다. 이직할 때도 자신의 직무 경력을 중심으로 비슷한 일로 옮겨가는 경우가 많다. 물론 미국에서도 사내에서 다른 업무로 배치되기도 하지만, 이는 매우 드문 케이스에 해당한다. 박정준이 쓴 <나는 아마존에서 미래를 다녔다>를 보면, 아마존에는 사내 이직 제도가 있다. 다른 부서의 채용 공모에 응모해서 뽑히면 부서를 이동해 일하는 방식이다. 사내에서 타 부서로 옮기기 위해서는 이직할 때처럼 경쟁해서 면접을 보는 셈이다.
중국 기업은 전문성을 가장 우선으로 친다. 거기에 일하면서 만들어지는 사람 사이의 네트워크를 자산으로 여긴다. 중국인이 한국 회사와 거래를 하게 되면 담당자가 자꾸 바뀌는 현상을 도통 이해하지 못한다. 중국은 ‘꽌시’라는 장기간의 신뢰 관계를 매우 중시한다. 오랫동안 겪어보고 진짜로 믿을 수 있는 사람과만 큰 거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 회사는 자꾸 거래 담당자가 바뀌니 사람에 대한 신뢰를 쌓기 어렵다고 호소한다. 심지어 공무원 조직에서도 장기간의 직무 경험을 중요시한다. 중국은 행정고시와 같은 고급 공무원 채용 시험이 없다. 일선 담당자로 시작해 10년 이상 전문성을 쌓고 상위 직무로 올라가야 한다. 그래야 능력을 인정받고 관리자로서 커리어를 쌓아갈 수 있다.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현재에 안주하지 않는 자세’를 전문성보다 더 강조한다. 요즘 기업 문화의 가장 큰 화두는 ‘MZ 세대’다. 과연 MZ 세대는 이런 순환 경력 제도를 어떻게 생각할까? 90년생 후배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전문성을 중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단, 한 직무에서 어느 정도 전문성이 쌓아야 이직하기 좋다. 그들은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무너지는 현실을 지켜보았다. 직장 생활을 하면 몇 개의 회사를 거치는 일은 당연한 과정이라 생각한다.
그러니 관련성이 적은 이 업무, 저 업무를 경험하며 경력을 누더기로 만들 생각이 없다. 한 후배는 빨리 전문성을 키워 당당한 한 사람 몫을 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꼭 이직하지 않더라도 ‘나는 이 업무에 전문성이 있다.’라는 자부심을 갖고 싶어했다.
과연 순환 근무는 합리적인 제도일까? 웬디 우드 교수는 책 <해빗>에서 매너리즘에 관한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소개한다. 메이저 리그의 선수들은 종종 팀을 이적하게 된다. 팀을 옮기면 그 선수를 둘러싼 환경이 송두리째 바뀐다. 만나는 사람, 운동하는 공간, 팀의 문화나 경기 운영 전략까지 변한다. 이러한 환경 변화는 한국 회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매너리즘을 막고 새롭게 열정을 불태우는 계기가 될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일하는 환경을 바꾸는 전략은 양날의 검이다. 성적이 부진하고 슬럼프에 빠진 선수는 환경 변화를 통해 성적이 향상되는 경우가 꽤 있었다. 환경이 변하자 늘 똑같이 훈련하는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법을 시도했다. 기존의 나쁜 패턴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배우기 위해 애쓰면서 부진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문제는 우수한 성적을 내고 있던 팀의 핵심 인력들이다. 이들이 팀을 옮기고 성적이 크게 떨어졌다. 환경 변화는 나쁜 습관을 끊어내는데 유효하지만 때로는 좋은 습관까지 바꾸어 놓는다. 순환 근무는 약이 될 수도, 독이 될 수도 있다.
우리 회사에서도 일 잘하는 직원으로 평판이 자자하다가 갑작스러운 발령 이후 이전처럼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직원이 많았다. 심지어 어떤 경우는 다시 원래 부서에 돌려보내 주었는데도 이전과 같이 역량을 발휘하지 못했다. 내가 이 직무에서는 최고라는 자부심에 일해왔는데 그게 한순간에 깨져버린 것이다. 한번 깨어진 자신감을 다시 회복하기는 정말 어렵다.
직원이 일이 지겹고, 더는 성장이 없다고 느껴질 때는 다른 일을 배정해 주는 편이 좋다. 하지만 문제없이 일 잘하고 실력이 늘고 있다면 전문성을 키우도록 배려해야 한다. 단순히 다양한 경력이 모두에게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관리자로 성장하려면 반드시 다양한 경력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도 선입견일 수 있다. 깊이 사고할 수 있는 사람이 넓게도 생각할 수 있다. 일정 수준의 전문성에 도달해 보지 못한 사람은 전문가의 통찰력을 알지 못한다. 넓고 얕은 지식은 소개팅에서 대화를 끌어가는 데는 유용할지 모른다. 그러나 조직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전문성 중심의 경력 개발이든, 다양한 업무 경험이든 뚜렷한 인사 정책이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이제 어느 회사도 경력 개발 자체에 대해 어떠한 지침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요즘에는 인사 관리 이론에도 표준화된 경력 개발 모델이 없다. 가장 최근의 이론으로 ‘프로티언 경력’이라는 게 있다. 그리스의 신 프로테우스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는데, 프로테우스는 자신의 모습을 바꿀 수 있었다고 한다. 프로테우스처럼 개인이 자신의 경력을 이리저리 바꾸며 스스로 책임지라는 의미다.
직원이 자신의 경력을 스스로 관리하라는 말이다. 부서나 직무, 회사 어느 것 하나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는데 어떻게 경력을 개발하라는 말인지 모르겠다. 그러다 보니 자격증이나 외국어 정도가 최고의 자기 계발이 되어 버렸다. 이런 수단은 우리의 경력을 나타내는 보조 수단일 뿐, 막상 결정적인 순간에는 어떤 일을 얼마냐 했느냐로 판단한다.
개인이 자기 경력을 관리하라는 말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니 조직에서 경력 개발 방법에 대해 조금 더 연구하고 방향을 찾는 노력을 해줬으면 좋겠다. 임원들은 새로운 일이 생기면 늘 사내에 전문가가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적합한 경력사원을 찾으려 애쓴다. 직원을 키우려는 노력은 게을리하면서 아쉬울 땐 돈을 주고 사 오겠다고 생각한다. 사내에 적합한 자원이 부족하다고 한탄하지 말고 긴 안목을 가졌다면 좋겠다. 장사 하루 이틀 하고 말 것은 아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