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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캡틴 Aug 04. 2021

가만히 있으면 정말 가마니인 줄 안다

군대는 계급 사회이지만 계급이 절대적이지는 않다. 

부사관들 보다 계급이 높은 장교가 부사관들을 우습게 봤다가 큰 코 다치는 일은 군대에서 흔한 일이다. 그래서 계급을 막론하고 짬이 있으면 존중을 해준다. 반면 짬이 없는 초급간부는 상대적으로 쉽게 보는 경향이 있다. 초급간부들 스스로도 모르는 것이 많아 위축될 수 있다. 때론 알고 있더라도 상대가 계급이나 짬이 있으면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게 쉽지 않다. 하지만 초급 간부라고 해서 무조건 숙이고 들 필요는 없다. 군대도 사람 사는 세상이다 보니 계급이 있어도 사람에 따라 대하는 게 달라진다. 

세상엔 약강강약의 사람들이 많고 약해 보이면 툭툭 건드려도 되는 줄 안다. 이때 가만히 당하고 있으면 그 사람은 만만하게 보고 나중에 또 건드린다. 하지만 계급이 낮더라도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보이지 않으면 쉽게 건드리지 않는다. 군 생활을 하면서 그런 일들을 여러 번 겪어 왔다. 초급간부 시절에는 그냥 계급 높은 사람들 말이 다 맞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그렇지 만도 않았다.  


소위 때 있었던 일이다

자대 전입 간지 3달 정도 지나서 보병 부대 지휘 훈련에 며칠 파견 간 적이 있었다. 우리가 지원 나간 부대는 3대대였고 첫날은 전체적으로 어떤 것들을 하는지 가볍게 보고 가는 정도였다. 하지만 돌아가는 길에 보병대대 1대대장을 만나 경례를 했다. 보병대대에는 중소위 계급이 없었기에 어느 부대에서 왔는지 묻고선 포병에서 왔다니까 뜬금없이 CFL이 뭐냐고 물어봤다.

CFL이 사격협조선인건 알고 있는데 그것의 개념을 설명하기엔 군사지식이 부족했다. 제대로 설명을 못하니 그 자리에서 포병이 그것도 모르냐고 까였다. 우리가 직접 파견 나가는 부대 대대장도 아닌데 소위를 보니 괜히 건드리고 싶었던 것 같다. 그날 CFL에 대한 개념을 몇 번씩 읽으면서 숙지했다. 


다음날 다시 3대대로 가서 3대대장과, 중대장들, 참모들 사이에서 예행연습을 하고 있었다. 잠깐 휴식타임을 갖는 동안 갑자기 지휘소에 1대대장이 들어왔다. 3대대장이 선임이라 인사를 하고 몇 마디 나누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그 사람은 또다시 CFL이 뭐냐고 물었다. 

한번 수모를 당해봤기에 이번에도 당할 수 없었다. 

"CFL은 사격 협조선으로 선 밖에 지역에 대해 자유로운 사격이 가능하도록 설정한 선입니다."

"그게 맞아?"

평소라면 내가 잘못 설명한 건가 위축되었겠지만 전날 달달이 외웠기에 확신이 차 있었다. 

"네 맞습니다."

"무슨 소리야. CFL은 선 밖으로 사격을 못하게 하는 선 아니야??"

"아닙니다. 그것은 RFL이고 CFL은 선 밖의 표적에 대해 자유롭게 사격하기 위해 설정하는 선입니다."

"내가 육대*에서는 그렇게 안 배웠는데?" *(육대는 육군대학의 줄임말로 소령 진급하면 교육받는 기관이다)

"여기 교범을 보시면 CFL에 대해 그렇게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1대대장은 말없이 내가 건네준 교범을 꼼꼼히 읽어봤다. 

"그러면 이걸 왜 설치하는 건데?"

"선 밖에 타겟에 대해 별도의 협조 없이 빠르게 사격하기 위해서 설정해놓습니다"


그러고 말없이 있다가 민망했는지 3대대장한테 물었다.


"선배님, 이게 맞습니까?"

"어 거기 교범 보면 그렇게 나와있잖아."


1대대장은 할 말이 없었는지 조용히 교범을 내려놓고 자리를 떴다. 그때 보병 중대장이 나한테 엄지척을 날렸다. 1대대장은 원래 그런 식으로 시비를 걸고 다니는 사람이라 보병 중대장들 사이에서도 기피 대상이었기에 같이 있던 중대장들도 통쾌해했다. 그 사람은 그 후 훈련이 끝날 때까지 3대대 지휘소에 오지 않았다. 



중위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동원 부대 특성상 행정적인 일이 많다 보니 이것저것 만들어야 되는 것도 많았다. 행정업무를 보다 보면 아스테이지, 코팅지, 테이프 등등이 정말 많이 소모되는데 보통 근처에 있는 군장점에서 이 물품들을 사 온다. 군장점은 외부에 있기 때문에 업무 시간에는 사 오는 게 제한되어 배달을 시키는데 시간이 안 맞으면 당일 물품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럴 때는 급한 대로 옆 부대에 가서 빌려오곤 한다. 보통 이런 거래는 직접 물품을 만드는 초급 간부들끼리 이루어지는데 서로 주고받고 하는 관계라 조금씩 가져가는 것은 게산도 잘 안 한다.  가끔 많이 빌려가는 날에는 기억해두거나 장부에 적어놨다가 꼭 돌려받아야 한다. 


어느 날은 상황판을 만드는데 아스테이지가 부족해서 계원에게 옆 대대 가서 빌려오라고 시킨 적이 있다. 

며칠 전에 옆 대대 보좌관이 아스테이지 1 롤을 통째로 빌려간 적이 있어서 그것을 받아오라고 했는데 계원이 옆 대대 과장님한테 혼났다고 하면서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냥 빌려달라는 게 아니라 우리가 준 것을 돌려받는 건데 그것을 말했냐고 물어보니 말을 했는데 그냥 꺼지라고 했다고 하길래 직접 찾아갔다. 

지휘통제실에 들어가니 옆 대대 과장님이 있고 아스테이지를 빌려갔던 후임이 구석에서 뭔가 하고 있었다. 

옆 대대 과장이 성격이 별로 안 좋기로 유명해서 껄끄러운 면은 있었지만 받아야 할 것을 받으러 왔기에 당당하게 들어왔는데 옆 대대 과장이 갑자기 나한테 성질을 내기 시작했다. 


"너네는 거지새끼도 아니고 왜 남의 대대에 와서 그렇게 얻어가냐"


원래 다른 대대와는 협조관계에 있어서 과장들끼리도 서로 도움이 필요할 때 주고받는 것이 있다. 그런데 여기 대대 과장이랑 우리 대대 과장이랑 사이가 별로 안 좋아서 교류가 많이 없긴 했다. 그래도 초급간부끼리 이 정도는 주고받았고 과장들도 그것을 모르는 것은 아닌데 뜬금없이 화를 내니 당황스러웠다.   


"보좌관이 저번에 빌려간 것이 있어서 그거 받으러 왔습니다."


"빌려가긴 뭘 빌려가. 하도 가져가길래 내가 왕창 사다 놨는데. 남의 대대에서 가져가지 말고 너네 운영비로 사." 


그때 물품을 빌려간 후임과 눈이 마주쳤는데 그 후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안절부절못하고만 있었다. 일단은 그 자리에서 알겠다고 하고 나왔다. 그 과장은 소위 때부터 나를 봐왔기에 그전에도 만만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보였는데 이건 아닌 것 같았다. 너무 열 받아서 대대로 돌아가서 계원과 후임에게 저쪽 부대에는 주지도 말고 받지도 말라고 경고했다.  

나중에 옆 대대 보좌관이 와서 그 상황에서 자신이 거들었으면 더 지랄했을 거라면서 미안하다고 하긴 했지만 너희와 다시는 거래를 안 할 테니 한 번만 더 빌리러 오면 가만 안 두겠다고 했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 옆 대대 통신장교가 와서 배터리를 빌려달라고 했다. 어제 그 자리에 통신장교는 없었기에 그 일을 몰랐는지 눈치 없이 와서 뭘 빌리려고 하니 이때다 싶었다.


"야 너네 대대랑 거래 안 하기로 했으니까 여기 와서 뭐 빌릴 생각 하지 마."

 

옆 대대 통신장교는 농담인 줄 알았는지 웃으면서 물었다.


"에이 보좌관님 왜 그러십니까. 우리 사이에."


"어제부로 우리는 너네 대대랑 거래 안 하기로 했으니까 그렇게 알고 딴 데 가서 알아봐." 


통신장교는 생각보다 단호한 반응에 당황하면서 돌아갔다. 

그리고 30분 정도 지난 뒤 갑자기 옆 대대 과장이 찾아왔다. 


"너가 우리 대대랑 거래하지 말라 그랬다며??"


거래를 안 하겠다고 한건 맞지만 공식적인 선언이라기보다 초급 간부들끼리 이야기한 것을 고새 가서 일러바친 통신장교 놈을 죽이고 싶었다. 


"아.. 그런 거 아닙니다."


"어제는 내가 좀 예민하게 굴었는데 미안하다. 서로 돕고 살아야 되는데. 우리도 얼마든지 빌려줄 테니까 필요하면 와서 가져가."


평소 성격이 안 좋은 사람이 생각 외로 저자세로 나온 게 의외였다. 당장 배터리를 구할 수 있는 곳이 우리 밖에 없었거나 물품을 주고받는 게 불가피하기에 사이가 틀어지면 아마 본인들도 불리할 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떨떠름 하지만 일단 알겠다고 하고 그걸 일러바친 통신장교에게 응징을 가했다. 

그런데 그때부터 그 과장의 태도는 달라졌다. 그 후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다시 한번 사과했고 함부로 하는 게 없어졌다. 



여러 사람들을 겪어 오면서 느낀 것은 세상엔 여러 종류 사람들이 있기에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일 수 없다. '약강강약'인 사람들은 물론이고 아주 다양한 방법으로 나의 자존감을 깎아 먹으려는 사람이 많다. 그런 사람들은 멀리해야 하지만 때로는 멀리할 수 없는 사람들도 있고 그렇다고 우리가 그 사람들을 고칠 수 없다. 그저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 남기 위해 적어도 그 사람에게만은 '약'이 되지 않으려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강'까지 되지 못해도 최소한 건들면 꿈틀거린다는 것만 보여줘도 건드리는 게 껄끄러워서 쉽게 건드리는 사람이 줄어든다. 험난한 세상에서 나를 지킬 사람은 결국 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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