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 서울 상암에서 파주로 향하는 제2자유로 초입. 잘못 본 걸까? 차들이 쌩쌩 달리는 왕복 6차로 중앙분리대를 따라 사람이 걷고 있다. 본 것을 의심하는 사이 바로 경찰차가 그 노인을 따라갔다.
몇 년 후 여의도로 출퇴근하던 때, 연희삼거리에서 좌회전해 명지대가 보이기 시작하는 왕복 4차로 오르막길, 할머니 한 분이 중앙분리대를 따라 걷고 있다. 분리대 옆 1차로에 차를 세우고 비상등을 켠 뒤 112에 신고했다. 다가오는 차들에 수신호하며 경찰차를 기다리는 동안, 할머니에게 왜 여기에 계신지, 집이 어디신지 물었으나 기억하지 못했다.
평소 같았으면 이상하네, 하며 지나갔을 텐데, 그 무렵 장모님이 알츠하이머 인지증으로 기억을 잃어가던 터라 인지증이 있는 노인임을 직감하고 경찰에 바로 연락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몇 년 전 제2자유로 중앙분리대를 걷던 노인이 떠올랐다.
장모님은 다른 알츠하이머 인지증 환자들과 비슷한 경로를 밟다가 결국 요양원에 가셨다. 통장을 장롱 이불 깊숙이 숨겼다가 누가 통장을 훔쳐갔다며 온 집안을 헤집는 일을 반복했다. 자식들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며 집을 뛰쳐나갔다가 동네 인근 주차장에서 발견되는 일도 있었다. 주간보호센터에 다니기도 하셨지만 이십사 시간 전담마크맨이 필요했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데 한 노인을 돌보는데도 온 마을이 필요함을 절감했다.
돌봄노동을 개인과 가족에게 떠맡기고 시장화한 대한민국. 이번 총선에선 변화가 있을까, 했는데 아니나다를까 정책 경쟁이 없었다. 제시된 정책조차도 대다수가 급조된 개발 공약일 뿐 돌봄 정책은 찾기 힘들었다. 그중에서도 저출생 문제만 거론되고 노인 돌봄 의제는 철저히 소외됐다. 앞으로도 가난한 노인은 ‘누추하고 신속하게 늙어가고’(최현숙) 부양자는 ‘간병(돌봄)살인자’, 신용불량자로 내몰릴까 두렵다. 퇴직연금 같은 건 언감생심인 돌봄·가사노동, 대리운전, 출판노동으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남의 일이 아니다.
22년 1월, 더불어민주당 최혜영 의원이 대표발의한 <유니버설디자인 기본법안>은 ‘장애, 연령, 성별, 국적 등을 넘어 누구나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는 생활환경’을 수립·시행하는 안이다(다른 많은 법안과 마찬가지로 논의도 거치지 못한 채 임기만료 폐기될 상황이다.) 장애인, 여성, 노인을 위해 사후에 추가로 시설을 마련하는 게 아니라 애초에 남녀노소 모든 시민이 누릴 수 있는 생활환경을 디자인하는 것이다.
22대 국회에게 제안한다. <유니버설디자인 기본법안>과 더불어 <유니버설 돌봄 기본법안>을 제정하자. 유아 돌봄, 초등 돌봄, 노인 돌봄, 장애인 돌봄(및 지원)을 비롯해 파편화한 모든 돌봄을 통합하는 지역사회 시스템을 마련하는 것이다. 스마트시티, 재개발, 도시재생, 그 무엇이든 지역사회 설계와 관련한 모든 것에 돌봄전문가를 참여시키자. 인지증 노인도 식당에서 서빙하고 아이 돌봄을 도우며 아이들도 언제라도 들러 만화책을 보고 놀 수 있는 커뮤니티 센터를 동네마다 세우자. ‘효녀’ ‘영 케어러’ ‘독박 간병’ ‘중년 여성 노동’에서 벗어나 시민으로서 서로 돌보는 마을공동체를 만들어 나갈 때 저출생, 삶의질, 일자리, 자살, 고독사 같은 문제들도 함께 개선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