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 커뮤니티 모임 공간 화장실에 모든 성별이 이용할 수 있는 성중립 화장실 표시가 붙었을 때 눈여겨보지 않았다. 어차피 화장실이 하나뿐인데 굳이 그런 걸 붙일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청소년 트랜스젠더 보고서’ <당신의 성별은 무엇입니까>(오월의봄)를 읽고 많은 청소년 트랜스젠더가 남자 화장실, 여자 화장실도 사용하기 힘들어 ‘집 밖에 나간 순간부터 물 한 모금 쉽게 마실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성별이분법적 사고를 깊이 반성했다. 꽃놀이 철이면 고속도로 휴게소 여자 화장실에 길게 늘어선 줄을 보며 성평등이 더디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이분법적 틀에 갇혀 있던 것.
고 변희수 하사의 죽음(사회적 타살)과 관련한 언론보도를 접하면서도 부끄럽게도 그녀가 느꼈을 고통을 구체적으로 헤아리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추상적으로, 부당한 사건으로 생각하며 넘어갔을 뿐. 하지만 8명의 청소년 트랜스젠더를 직접 인터뷰하고 223명(15세-24세)의 설문조사를 바탕으로 쓴 <당신의 성별은 무엇입니까>를 읽으며 그들이 느끼는 혼란과 불편함, 가정과 학교에서부터 겪는 차별과 고통을 구체적으로 듣게 되었다.
한국사회는 태아를 위해 준비하는 옷 색깔과 망자가 입는 수의 모양까지, 말 그대로 요람에서 무덤까지, ‘남녀 분반, 남녀 학번, 남녀 기숙사, 남녀 교복, 남녀 화장실’부터 주민등록번호를 비롯해 온갖 법·행정 문서까지 모든 유무형의 시스템이 남녀로 양분돼 있다. 이런 사회에서 이성애자 남성으로서 내가 누려온 안온한 일상이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에게는 하루하루 견뎌내야 하는 고통스럽고 폭력적인 일상의 토대라는 사실에 새삼 깜짝 놀랐다.
트랜스젠더들은 누구나 최소한의 돌봄과 지지를 받아야 할 가정과 학교에서부터 혐오와 차별을 겪는다. “몸이 자꾸만 제가 여자라고 말하는 것 같아 우울했던” 트랜스젠더 남성에게 부모는 “나도 어릴 때 그랬어. 그냥 이성애자로 살면 안 되겠니.”라며 ‘회유’한다. 학교에서 정체성을 드러내면 학생들은 외려 아웃팅과 집단따돌림을 가한다. 이를 호소하면 교사들은 “네가 먼저 불쾌한 행동을 했으니 어쩔 수 없다”며 두둔, 방임한다. 성별정정절차를 밟고 있는 트랜스 여성에게 판사는 “생리를 하느냐”고 묻는다.
대통령이 여성가족부 폐지를 공약하고, 지자체장이 ‘성다수자’란 해괴한 말까지 만들어 혐오 발언을 일삼으며, 정치인들이 ‘사회적 합의’(누군가의 존재 양식에 합의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어불성설이지만 여론조사도 차별에 금지하자는 여론이 다수다)를 핑계로 내일의 일로 영원히 미루고 있는 사회에서 무지, 혐오, 방관은 가정과 학교를 포함한 사회 전 영역에서 재생산된다. 그 사이 ‘다음 변희수’가 만들어진다.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차별금지법을 제정한 나라인 캐나다에는 ‘모두의 화장실, 성중립화장실이 학교만이 아니라 쇼핑몰 등 공공장소에서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북유럽만이 아니라 ‘칠레, 아르헨티나, 콜롬비아 등 중남미 국가들에서도 공식 문서에서 논바이너리 성별 표기를 인정하는 사례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이런 변화가 섬세한 상호존중 문화를 만들어 낸다는 것은 ‘시기상조’ ‘사회적 합의 필요’ ‘역차별’ 같은 반대자들이 내세우는 근거들이 모두 틀렸음을, 그저 반대를 위한 반대임을, 혹은 지지 세력을 결집하거나 타자화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으려는 애씀일을 보여준다.
성별이분법에서 벗어나는 것은 논바이너리만이 아니라 바이너리도 해방한다. 여자 치마 교복, 남자 바지 교복을 비롯해 이분법적 문화는 사실 성적 표현, 자기 표현이 무궁무진한 바이너리 개개인도 억압해 오지 않았는가. 유니버셜 디자인이 비장애인에 대한 역차별이 아니라 외려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모든 시민이 편히 누리도록 하는 설계이듯이 (성)소수자를 존중하는 문화·제도를 시행하면 모든 시민이 더욱 행복할 것이다.
소수자의 해방일지는 비소수자의 해방일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