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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퍼피 Nov 19. 2020

우당탕탕 첫 작사 도전기



작사를 하게 됐다.

에세이를 쓰다 보니 노랫말이 쓰고 싶어졌고 그걸 또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녔더니, 어느 지인이 가이드 음원을 툭 던져준 것이다. 하고 싶어? 그럼 해봐. 날 것으로 실전에 투입돼버렸다.


가이드 음원은 영어 학원에서 수업을 듣고 있을 때 도착했다. 당장 작사를 시작하고 싶은 마음에 다리가 달달달 떨렸다. 책상도 같이 덜덜덜 떨리자 옆에 한 칸 띄우고 앉은 분이 나를 살짝 흘겨봤다. 미안해요, 제가 지금 설레고 흥분돼서 그래요.


학원이 끝나자마자 이어폰을 귀에 쑤셔 넣고 음원을 들었다. 감미로운 발라드곡이었다. 듣자마자 사랑, 고백, 프로포즈 같은 단어들이 떠올랐다. 이런 단어는 이미 삶에서 없어진 지 오래됐지만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 단어들을 꼭 쥐고 집으로 돌아갔다.






최근에 산 책 『김이나의 작사법』을 허겁지겁 펼쳤다. '처음'이라는 면죄부를 방패 삼아 무턱대고 쓰고 싶은 대로 작사할 수 있었지만, 이왕 기회가 온 거 조금이라도 갖추고 시작하고 싶었다.


책을 후루룩 읽었다. 머릿속에 아주 얕고 엉성한 작사법이 생겼다. 자, 처음에는 가이드 음원을 들으며 음절 수를 따랬지. 다음에는 음원을 듣고 또 들으며 화자의 캐릭터와 스토리를 상세하게 만들고. 그다음에는? 아 일단 쓰자!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 혼자인 삶에 너무도 만족한 채 살고 있던 두 남녀가 운명적으로 만나 사랑에 빠지고, 남자가 먼저 고백을 하는 스토리를 만들었다. 이 스토리를 기반으로 8시간에 걸쳐 첫 번째 가사를 썼다. 백지상태의 첫 작사.. 얼마나 유니크한 단어들이 나올까? 너무 독창적이면 곤란한데 하핫. 완성하자마자 같이 사는 보현 언니한테 달려가 들려주었다. 아니, 직접 불러주었다.


사랑해요호오~ 불러주며 느꼈다. 지구 상에서 제일 흔한 단어들이 죄다 여기 모여 정모하고 있네. 보현 언니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줬지만 나는 심각한 고뇌에 빠졌다. 신선한 상태에서 썼다고 느꼈던 가사가 평범함의 끝을 달리고 있다니. 스스로가 초라해 힘이 쭉 빠졌다. 못 견디겠어. 그냥 잘래. 흐물거리는 몸과 마음으로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벌떡 일어나 심기일전하고 12시간에 걸쳐 두 번째 가사를 만들었다. 스토리는 이렇다. 오래 사귄 연인이 있다. 둘은 함께 잠들고 일어나는 게 이젠 일상이다. 어느 날 이른 새벽, 잠에서 깬 남자는 옆에서 곤히 잠든 연인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한다. 새벽의 푸른빛을 머금은 고요한 얼굴. 그 얼굴에서 어느 순간 사그라들었던 감정이 샘솟는다. 그 감정을 꺼내 잠든 연인에게 속삭인다.


새벽이라는 시간 설정과 푸른빛이라는 시각적 이미지를 추가했다. 음, 공감각적이고 좋아. 두 번째 가사는 친한 친구들에게 보여줬다. 폭발적인 반응은 아니었다. 박수갈채를 원했던 나는 또다시 어두운 심연으로 빠져들어 갔다. 머리를 몇 번이나 쥐어뜯고 쓸어넘기고 비비적거렸는지 방바닥엔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떨어져 있었다. 12시간을 주구장창 앉아서 '작사 비스무리 한 것'을 하고 있으니 혼이 나갔다. 이만 불을 끄고 침대에 풀썩 누웠다.


구질구질한 나는 침대에 누워서도 가이드 음원을 들었다. 좋은 스토리야, 단어야, 제발 떠올라줘. 순간 친구가 해준 피드백 가운데 있었던 '겨울'이란 단어가 생각났다. 하지만 더는 기력이 없었던 나는 내일을 기약하며 눈을 감았다.


다음 날, 이제는 내가 몇 시간 동안 앉아있는지 의식도 않은 채 작사를 해나갔고 세 번째 가사를 만들었다. 계절은 겨울이다. 함박눈 펑펑 내리는 날, 집안에서 창밖을 보고 있던 남자가 연인을 부른다. 이리 와서 옆에 앉아. 같이 눈 내리는 풍경을 보자. 연인은 나란히 앉아 창밖을 본다. 남자는 고개를 돌려 연인을 본다. 흰 눈처럼, 아니 흰 눈보다 아름답다. 그리고 세어본다. 너와 내가 보는 이 눈은 몇 번째 눈일까. 이내 그만둔다. 수는 중요치 않아. 매년 겨울 함께 눈을 볼 테니까. 뭐 이런 스토리의 가사다.


가사를 새로 쓰면 쓸수록 스토리가 좁아지고 세밀해졌다. 그리고 확실히 처음 가사보다 벌스(verse)와 후렴이 분명해지고 라임이 생겼다. 세 번째 가사는 아직 누구에게도 피드백을 받지 않았다. 혼자서 만족스러웠기 때문이다. 세 번째 가사를 쓰며 두 번째 가사도 다시 만졌기에 온전한 두 개의 가사가 생겼다. 가이드 음원을 던져준 지인에게 이 두 가지 가사를 다 보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까 전, 그 지인과 대화를 나눴다. 지인이 발음 디자인에 관해 알려주었다. 가이드 뉘앙스에 따라 가사 발음을 살리라고 했다. 실제 예시도 보여줬다. 누가 뒤통수를 갈긴 느낌이 들었다. 전 이미 완성했다고 생각한 가사를 두 개나 가지고 있는데요, 둘 다 발음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았는걸요..? 아니 가이드 맞춰 부르긴 불렀는데, 별생각 없이 불렀는디요?


이 에세이를 다 적고 나는 다시 가사를 수정하러 간다. 이번엔 발음에 맞게 가사를 뒤엎어야 할지도 모른다. 오늘 에세이는 우당탕탕 첫 작사 도전기를 쓰고 싶었다. 현재 진행 중인 생생한 도전기다. 어떤 가사가 진짜_레알_최종이 될지 궁금하다.


당신도 궁금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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