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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퍼피 Nov 23. 2020

꿈도 유전인가보다

아빠가 거쳐온 길을 매번 뒤따라 걷고 있는 딸의 이야기

사진은 필자의 아빠와는 관련이 없는 인물이다. 글의 이해를 돕고 분위기를 살리고자 첨부했다.



김문구의 딸은 고3 시절, 몇 월인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초여름 점심시간에 소나무가 우거진 학교 야외 강당에서 친구들과 각각 나무 벤치 하나씩 차지하고 드러누워 있었다. 누워서 멍하니 파란 하늘과 큰 나무를 바라보고 있는데, 얼굴 근처로 나뭇잎 하나가 살랑살랑 휘날리며 떨어졌다. 그 장면이 슬로우 모션처럼 보이더니 내면에서 어떤 외침이 들렸다. "연기를 해야겠다."


사실, 연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하루아침에 생겨난 뾰루지처럼 갑작스러운 게 아니었다. 딸은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연기가 하고 싶었다. 다만 티 내지 않고 속으로 숨겨왔을 뿐. 그러나 이제는 그 꿈을 감추지 않고 꺼내어 실현하고 싶었다.


딸은 아빠에게 연극영화과에 가겠노라 말했다. 연극영화과에 가서 연기자가 되겠다고 말했다. 아빠는 그 말을 듣자마자 한 번도 본 적 없는 수준의 화를 내며 반대했다. 아빠가 반대했던 이유는 그 직업을 경험한 당사자였기 때문이었다. 아빠는 연극영화과 출신이었고 청년 시절 연극배우를 했었다. 그 일이 얼마나 힘들고 배고픈지 피부로 알았던 아빠는 그렇게 화를 내며 반대했던 거다.


딸과 아빠는 소리 지르며 싸웠다. 누가 더 악을 잘 쓰는지 내기하는 것처럼. 딸은 방에 들어가 기절할 정도로 꺼이꺼이 울었다. 며칠을 싸우고도 계속 엉엉 울며 연기가 하고 싶다고 하니, 아빠는 딸에게 타협안을 내밀었다. 일단 서울권 대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그 뒤로 연기를 배우라고. 서울권 대학교에 입학만 하면 그다음부터 연기를 하든 뭘 하든 터치하지 않겠다고. 딸은 아빠와 약속하고 공부에 집중했다.


딸은 서울권에 있는 대학교 디자인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학교 연극 동아리에 들어가서 연기에 첫발을 내딛고자 했다. 아빠에게 학교 연극 동아리에 들겠다고 말했다. 아빠는 화를 내며 반대했다. 분명 서울권 대학교에 입학하면 뭘 하든 터치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딸은 너무 어이가 없고 화가 났다. 하지만 다시 예전처럼 아빠와 소리 지르고 엉엉 울면서 싸울 자신이 없기도 했고, 아빠가 약속을 어기면서까지 꾸준히 반대하는 걸 보면 연기는 정말 해서는 안 되는 건 가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딸은 하이에나에게 목덜미를 물려 죽음을 덤덤히 받아들이는 영양처럼 큰 반항 없이 알겠다 말하고 그 뒤로 인생에서 '연기'라는 키워드를 지웠다.






아빠 김문구는 몇 년 전부터 시 쓰는 것에 푹 빠져있었다. 그렇게 꾸준히 시를 쓰며 어찌어찌하다 보니 작은 문예지의 시인으로 등단하게 됐다. 본인의 시가 실린 문예지가 몇 권 출간되기도 했다. 딸은 시 쓰기를 좋아하는 아빠를 보며 아빠는 나중에 본업을 관두고 시인이 되겠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아빠는 시에 관한 얘기를 일절 하지 않았다. 아빠는 시를 써서 블로그에 올리곤 했는데 그 일도 어느샌가 멈췄다. 지금은 본업만 열심히 하고 있다.


딸은 아빠에게 물었다. 이제 더는 시를 쓰지 않는 거냐고. 아빠는 그렇다고 했다. 왜 쓰지 않느냐고 물으니 시상이 안 떠오른다고 했다. 대답이 영 시원찮게 느껴졌던 딸은 꼬치꼬치 캐물었다. 아빠는 그제야 감췄던 이야기를 꺼냈다. 글로는 돈이 안 되어 그저 취미로 하게 됐다.


딸은 알겠다고, 그저 궁금해서 물어본 거였다고 말하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딸은 취업을 잠시 미뤄두고 글을 쓰고 있다. 취업 전 내면에서 어떤 외침이 들렸기 때문이다. "글을 써야겠다."


딸은 사람들에게 편지 답장을 보내는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자 등록도 해서 그럴듯한 모양새도 갖췄다. 뿐만 아니라  매일 에세이를 써서 사람들에게 내보인다. 에세이를 쓰다 보니 작사에도 관심이 생겨 작사 과외를 등록했다. 곧 작사를 배울 생각에 하루하루가 신이 난다. 딸은 앞으로도 어떤 글이든 계속 쓰고 싶다.


이 모든 건 아빠 김문구는 모른다. 사업자를 낸 것도, 작사 과외를 등록한 것도, 결정적으로 글을 쓰겠다 마음먹은 것도. 딸은 오랫동안 이 사실을 함구하고자 한다. 글을 쓰겠다고 말하면 연기를 하겠다 말했을 때처럼 길길이 날뛰며 반대할 게 뻔하니까. 아빠는 딸보다 먼저 글을 써봤고, 글 쓰는 일에 어려움을 겪어봤고, 결국 그만두었으니까. 이전에 아빠의 반대로 연기를 도전조차 해보지 못하고 포기한 경험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기에 딸은 무작정 도전부터 하고 봤다.


허나 영원히 비밀로 할 수는 없겠지. 들키거나 스스로 말하거나 둘 중 하나겠지. 딸은 후자가 되길 바란다. 스스로 말하는 날이 온다면 그때는 글로 먹고살고 있다는 뜻일 테니까.






딸은 곰곰 생각한다. 아빠를 참 많이 닮았다고. 아빠가 거쳐온 길을 매번 뒤따라 걷고 있으니.


아빠를 닮아 곱슬머리를 가진 것처럼 꿈도 유전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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