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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퍼피 Nov 17. 2020

평범한 장면에 그렇지 않은 단상



2018. 7. 11


할리스 일감호점 2층 창가 자리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데, 창밖으로 느릿느릿 걸어오는 할아버지가 보였다.


할아버지는 전봇대 옆에 놓인 낡은 폐지 수거용 손수레 앞으로 가더니, 손수레 앞에 양동이를 뒤집어엎고 그 위로 털썩 앉았다. 그리고는 어디선가 가져온 목재판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망치로 두드리고, 손수레도 이리저리 힘겹게 돌려가며 '무언갈 만들고 수리하는' 작업을 했다.


점점 물러가는 비구름 뒤로 해가 가려져 있어 볕이 강하지는 않았지만, 7월 중순의 여름이라 밖은 더울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할아버지는 뒤집힌 양동이에 꿋꿋이 앉아 작업을 계속해나갔다.


삼사십 분 가량이 흘렀을까. 할아버지는 또 다른 작업을 하기 위해 세로로 세워두었던 낡은 손수레를 제모습으로 세웠다. 그때 할아버지 곁으로 할머니가 느릿느릿 다가왔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와 함께 손수레 바닥에 깔아놓은 장판을 손으로 착착 눌러가며 정돈했다. 정돈이 끝난 후에는 손수레 근처에 있던 박스들을 장판 위로 안전하게 올려두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 곁에 잠시 머물다가 느릿느릿 곁을 떠났다.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떠나고 나서도 손수레 이곳저곳을 세심하게 만져댔다. 손수레에 무언갈 엮고, 휘감고, 두드리고.


할아버지가 오기 전, 주인에게 버려진 것 같았던 낡은 손수레는 이제 할아버지의 손길로 인해 생명력이 한 움큼 부여된 듯 보였다.


할아버지는 손수레 안에 놓인 박스 위로 큰 비닐을 올려 사방을 꼼꼼하게 덮었다. 혹시 올지 모를 비에 박스가 젖을 수도 있으니 사전에 대비하는 듯 보였다. 할아버지는 쇠 막대기로 비닐 위를 다시 한 번 툭툭 내리쳤다. 그 덕에 비닐은 바짝 밀착되어 더 안전하게 박스를 보호할 수 있게 됐다.


할아버지는 비닐을 내리쳤던 쇠 막대기로 땅을 짚고 아까 전 할머니가 떠난 방향으로 절뚝절뚝 느릿느릿 돌아갔다.


나는 다시 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읽으며 생각했다.


오늘 난 운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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