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30일 금요일 밤부터였다. 새벽 내내 목에 가래가 껴 잠을 못 잤는데 아침이 되어, 조카들이 집에 들어오는 소리에 이불을 털고 일어났다. 오후까지 조카들을 봐 주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편도선이 붓고, 칼칼한 느낌의 가래가 끼고, 입 안이 바짝 말라 음식의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렇게 심한 감기 증세는 오랜만이었다. 부드럽고 시원한 아이스크림... 같은 것만 먹고 싶었지만 빈속에 아이스크림만 먹으면 속이 불편해질테니 꾹. 참고 모래같이 퍼석거리는 밥알을 입안에 밀어 넣고 약을 먹었다.
사실. 감기에 걸린다는 건 신경 쓰이는 상황은 아니다. 며칠만 땀 빼면 나아지는걸. 게다가 다 나았을 때는 개운한 기분까지 드니 감기 걸리는 거에 큰 거부반응은 없다. 감기에 걸리지 않은 채 한 해를 보내는 때도 있어서 왠지 반가울 때도 있는 감기.
그런데 이번에는 반갑지 않았다. 오후에 그를 만나기로 했는데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약속을 취소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억지로 밥을 먹고 약을 먹으며 오늘까지만 잘 버티어 달라고 내 몸에게 부탁했다.
오후 4시에 조카들이 집으로 돌아간 뒤, 기운 없고 으스스한 몸으로 옷을 챙겨입고 약기운에 취한 몽롱한 기분으로 준비된 장소로 나섰다.
그를 만났다. 그는 한달 반 전쯤 소개로 만나게 되었는데 첫 만남에서 두번째 만남을 기다리게 된 사람이었다. 처음이었다. 그동안의 소개팅은 모두 한 번의 만남으로 끝이 났었다. 사람이 마음에 들어오지 않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이제 더는 사람을 만날 수 없을 것 같다 생각하며 내려놓고 살았는데 오랜만에 반가운, 마음이었다. 반가워서 소중했다.
커피숍에서 2시간 정도 각자 할 일을 한 뒤 저녁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가로수길 스타벅스에 각자의 노트북을 켜고 앉았다. 20~30대 사람들이 많이 오고가는 가로수길 커피숍에서 작업하고 있으니, 커피숍을 들어왔다가 나가는 젊은이들이 물결처럼 끊이지 않았는데 그들의 옷차림새며 표정은 만개한 벚꽃이었다.
주변은 봄인데, 정작 내 몸은 겨울이었다. 갑자기 올라간 기온 때문에 커피숍에서는 미미한 에어컨 바람이 나오고 있었는데 약한 바람에도 몸은 한기를 느꼈다. 겉옷을 걸치고는 다리를 꼬고 양팔로 몸을 감싸 앉은 채 몸을 최대한 웅크렸다. 혹시나 아픈 티가 나서 그가 여기까지만 보고 귀가하자고 하거나, 내 컨디션을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꾹 참으면서.
버틴 덕에 저녁 식사까지 무사히 끝내고(?) 그와 헤어져 집에 도착했을 때. 몸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해열제를 입에 털어 넣고 전기 장판 위에 솜이불을 덮고 누웠다. 왼쪽으로 돌아누워 최대한 몸을 웅크렸다. 전기장판에 닿은 몸이 데워지면서, 딱딱하게 굳은 몸이 서서히 풀어져 갔다.
데이트 안 망치려고 몸을 망치다니... 이 나이에(82년생) 뭐 하는 짓인가 싶어, 헛웃음이 났다.
문득 예전에 봤던 한 단막극의 장면이 떠올랐다. 2000년쯤이었던 것 같고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최강희라는 여배우가 출연했었다. 고등학생 남녀의 애틋한 첫사랑 이야기였다.
여학생은 몸이 약해서 코피를 자주 흘렸고 학교도 제시간에 등하교하지 못했다. 또래와 어울리지 못하고 늘 혼자 지하철로 등하교하는 여학생은 맞은편 지하철 플랫폼에서 한 남학생과 우연히 반복적으로 만나게 된다. 그러다가 둘은 서로의 첫사랑이 된다. 이름도, 어디 사는지도 모르지만 지하철 역사에서 그들은 시선과 마음을 공유한다. 대화를 나누지 않지만 한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그 둘에게는 충분한 듯 보였다. 둘의 감정이 고조될 무렵, 여학생은 병세가 악화하여 결국 죽게 되는데 남학생은 그 사실을 몰라 갑자기 나타나지 않는 여학생을 마냥 기다린다. 남학생은 대학생이 된 다음에도 그들만의 장소로 나가 여학생을 기다린다. 이렇게 끝나는 단막극. (내 기억이 왜곡되었을 수도 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 단막극에서 생생하게 기억하는 장면이 있다. 남학생이 여학생의 왼손을 잡고 뛰는 장면이 있었는데 갑자기 잡아끄는 바람에 여학생은 오른손에 쥐고 있던 지하철 매표권을 놓치고 만다. 오른손을 조금만 힘 있게 뻗으면 주울 수 있었던 매표권이었는데, 남학생과 잡은 손이 풀릴까 봐 결국 줍지 못하고 만 장면.
여학생은, 아마도. 남학생과 맞잡은 손에 조금이라도 틈새가 생기지 않기를 바랐을 것이다. 틈새가 생기면 다 잘못될 것만 같아서 불안했을테다. 그래서 남학생의 손을 잠시라도 놓지 못 했을 것이다.
나 또한, 그런 심정이었던 걸까. 전화가 걸려오면 놓치면 안 되고, 약속이 정해지면 제일 중요한 일정으로 여기고, 그 앞에서는 활기차고 밝은 모습을 보여 주려고 노력했다. 그 사람과 어떤 모양으로 얼만큼 지속될지 모르겠지만, 일단 시작하는 단계에서는 틈새 없이 단단하고 견고하고 싶었다. 단막극 속 여학생과 남학생이 단단하게 손깍지 한 것처럼.
바보. 단단할수록 쉽게 깨지는 법인데.
그 날 무리하는 바람에 목감기가 제대로 와서 열흘 가까이 잔기침하느라 잠을 못 잤다. 기침을 하도 해서 먹은 것을 다 토하기도 했다. 목소리가 아예 안 나오고, 목이 말라서 침을 삼킬 때마다 따가웠다. 목소리가 안 나오니 그와 전화 통화가 어렵고, 기침이 심해 만나지 못했다. 회사에서도 일을 제대로 못 해 눈치 보며 조퇴하고, 회복이 늦어져 병원에서 수액도 맞아야 했다.
감기도부터 호되게 당한 뒤 겨우 회복단계로 들어섰던 날. 지난 열흘간 목을 감싸고 있던 손수건을 풀며 생각에 잠겼다. 손수건을 풀어 낸 김에 그에 대한 마음도 느슨하게 풀어버리자고. 잘 되고 싶은 조급함 대신 잘 될수 있을꺼야 라는 여유로운 태도를 갖자고. 모든 것이 완벽해야 한다는 견고함 대신 상황에 따라 자연스럽게 임하는 유연한 태도를 갖자고.
그럼으로, 손깍지를 가볍게 잡자고. 맞잡은 손과 손 사이로 여유와 유연이 통과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