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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형원 Dec 27. 2021

괜찮아. 곧 크리스마스야

"괜찮아. 이제 곧 크리스마스야"


그는 휜 이가 드러나게 씩 웃으며 말했다. 한 여름. 그것도 찌는 무더위에 뭔 놈의 크리스마스라는 건지. 생뚱맞다고 생각했지만. 깜깜한 마음 한켠에 트리의 불이 켜지며 잠시나마 환해지는 듯했다. 그의 크리스마스는 삶이 힘들 때마다 계절을 가리지 않고 수시로 찾아왔다. 봄에도. 여름에도. 가을에도. 곧 크리스마스라며 천연덕스럽게 미소 짓는 그를 보며. 실제로 크리스마스까지는 얼마나 남았나 세어 보곤 했다.


크리스마스


이 다섯 글자에는 그런 힘이 있다. 언제 들어도 설레게 만드는. 그때가 되면 다 괜찮아질 거라 굳게 믿게 만드는 마법이. 산타가 없다는 걸 알게 된 까마득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크리스마스라고 별거 없다는 걸. 여태껏 수십 번의 크리스마스를 반복하며 더 이상 속지 않을 만도 했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는 기분 좋은 판타지는 나도 모르는 내 안 깊숙이 남아 있는지. 그의 말이 힘이 되곤 했다.


하지만 12월이 오고 크리스마스가 되자 일 년 내내 크리스마스 노래를 부르던 그에게서는 아무 말이 없었다. 괜스레 속은 느낌이었다. 먼저 연락을 했다. "이제 크리스마스네". 그에게는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짧은 답변만 왔다. 살짝 김이 빠졌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그가 춤이라도 출 줄 알았을까.




작년에는 이브 새벽부터 남편이 아프기 시작해 크리스마스를 응급실에서 보내야 했다. 보호자는 병원 안으로 들어오면 안 된다는 방침에 크리스마스트리 하나 없는 휑하고 스산한 병원 부지를 매서운 추위 속에서 덜덜 떨며 배회하며. 불행이 모두가 축복하는 날에 닥치면 얼마나 더 가혹하고 잔인할 수 있는지를 뼛속까지 느꼈다.


하늘에 대고 삿대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크리스마스잖아요.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참 뭐 같은 한 해에 어울리는 암담한 크리스마스라고 생각했다. 며칠을 마음을 졸이고 남편이 쉬는 동안 크리스마스 애니메이션 <폴라 익스프레스>를 보는데 어느 순간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산타를 더 이상 믿지 않는 한 아이가 북극행 크리스마스 특급 열차에 올라타서 산타 마을에 가는 따뜻하고 행복한 내용이었는데, 함박눈처럼 굵직한 눈물이 내렸다.


그게 그때 그렇게 큰 위로가 될 수 없었다. 현실 속 크리스마스는 냉혹하고 차가웠지만 화면 속 크리스마스는 따뜻하고 아름다웠다. 100분의 시간 동안 그 마법의 세계 속에 풍덩 빠져서 잠시 모든 걸 잊고 행복했다. 크리스마스 때면 티브이를 틀고 이불 속에서 특선 영화와 만화를 보던 어린 시절로 잠시 돌아간 것 같았다.


단순히 산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믿음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그 믿음이 절실했다. 며칠 동안 마음을 졸이고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남편이 회복하자 기적은 크리스마스에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건강하고 사랑하는 모든 날들이 다 기적이었다.




이번 크리스마스는 시부모님 두 분 다 코로나에 걸리면서 남편과 온전히 둘이서만 보냈다. 다행히 두 분 다 가벼운 감기 증상에 그치고 빠르게 회복 중이시지만, 올해의 크리스마스도 마냥 즐거운 마음으로 보낼 수는 없었다. 소규모 인원으로  가족 식사라도 하려고 했던 크리스마스 계획은 이브 전날에 무너졌고. 미리 준비한 선물이라도 크리스마스 날 시부모님 현관 앞에 두고 올까라는 말에 남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게 더 우울할 거라고 기다리자고 했다.


크리스마스는 분명 특별한 날이지만. 병이라고. 바이러스라고. 크리스마스를 피해서 비껴가 주지는 않았다. 그 사실은 달력에 찍힌 나머지 363일과 다르지 않았다. 산타는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았고. 크리스마스라고 기적이 일어나지도 않았다. 북극행 크리스마스 특급 열차가 우리 집 앞에 서서 경적을 울린다고 해도, 나는 기차에 타기는커녕 창문 밖을 내다보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랬던 것처럼 다가올 크리스마스를 기다릴 것이다. 산다는  유달리 힘들게 느껴질 때면. 그때 그가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에게 말해줄 것이다. "괜찮아.  크리스마스야." 그에게 중요했던  크리스마스가 아니라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모든 날들이었고. 그날들은 버티고 감당해야 하는 삶의 대부분의 날들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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