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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형원 Jun 19. 2022

알아듣지 못해 해방되다

몇 년 만에 독일에 왔다. 독일에 사는 동생에게 얼마 전 연락을 받은 후였다. “언니. 자전거 타다 넘어져서 병원에 가보니 발이 부러졌대. 뼈가 붙을 때까지 삼 주 동안 집에 있으래”. 동생과 남편은 올해 삼재에 들어간다. 평소에는 이딴 거 안 믿는다 싶다가도, 남편이 얼마 전에 잡은 직장을 잃고 동생이 발이 부러지는 재앙이 겹치자 삼재가 떠올랐다. 이게 뭔 일인가 마음이 찹잡했다.


동생은 독일의 한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 연주를 한다. 코로나 이전에는 동생을 보러 종종 독일에 갔지만, 코로나 후에는 한 번도 가지 못했다. 장도 보러 갈 수 없는 동생을 위해 동생의 오케스트라 동료들은 장을 봐서 엘리베이터도 없는 동생의 집으로 직접 가져다주었다. 나도 가봐야겠다 생각하면서, 갑작스레 다시 실업에 처한 남편을 혼자 두고 가기엔 마음이 쓰여 고민하다 결국 왔지만 오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남편은 다행히 다른 곳들에서 연락이 오고 테스트를 거친 후 협상만 남겨놓고 있었지만, 왜 내 삶은 한시도 평탄할 일 없을까라는 생각이 마음을 짓눌렀다. 한국에 얼마 전에 다녀와 리셋한 기분이었다면, 파리에서 독일로 가는 내내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그때 하필 기차가 연착되어 갈아탈 기차를 놓치게 되었다. 겨우 몇 십분 기다리면 다음 기차가 오게 되어 있었지만, 펄펄 뛰며 분개했다. 그냥 세상만사가 짜증 났다.




독일에서는 거의 동생 집에만 있었다. 깁스를 한 동생과 놀러 다닐 수도 없었고, 나도 계속 일을 해야만 했다. 매일 남편과 전화를 하며 새로운 직장과 어떻게 월급 협상이 되어가나 확인했고, 그만큼 열심히 통장 잔고를 들여봤다. 불과 한 시간 전에 확인한 잔고가 그 사이 뻥튀기처럼 부풀어있는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며. 온 마음을 다해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들어준다고 하던데, 한숨을 쉬며 은행 앱을 닫고 남편에게 물어본다.


“어떻게 됐어?”


독일에 있는 동안 생일을 맞았다. 생일날 아침을 먹고 집을 나섰다. 장도 보고 바람도 쐴 겸 돌아다니는 중 갑자기 비가 오기 시작했다. 비를 피해 급하게 눈에 보이는 카페로 들어갔다. 영어로 커피를 한 잔 시키고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며 앉아 있는데, 너무도 편했다. 왜 그럴까 생각하다, 여기서 오가는 말들 중 단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든 말들이 배경 음악처럼 웅성거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처음이었다. 그동안 여러 번 독일에 왔고. 언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한 곳들을 수차례 다녔지만. 알아듣지 못한다는 사실이 이토록 큰 해방처럼 다가온 것은. 그러면서 생각했다. 그동안 얼마나 길을 다니며 혹은 카페에 앉아서도 오가는 모든 말들을 귀 열어 듣고 있었던 것인가. 나와 무관한 그 말들을 듣고 마음대로 해석하고 판단하고. 말하는 주체에 대해 ‘이런 사람일 것이다’ 멋대로 재단하고. 말말말. 그 말이 대체 뭐라고.


한때는 이 세상의 모든 말을 알아듣고 싶었다. 그래서 일찍 외국어 공부에 매진했고, 사개 국어 구사를 꿈으로 삼았다. 그렇게 공부한 언어 덕에 이방인으로 살면서도 언어로 인한 불편함은 특별히 느끼지 못하며, 프랑스 회사에서 유일한 외국인으로 근무하고 있다. 영어 불어 스페인어를 할 수 있어서 여행을 다녀도 출장을 가도 많은 혜택을 봤다. 하지만 어느 순간 말을 알아듣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말을 많이 알아들으면 알아들을수록, 듣고 싶지 않은 말도 더 많이 듣게 되었다. 못 알아 들었으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말들에 혼자 분개하고 곱씹으며, 마음의 평화를 접시처럼 바닥에 내던져 ‘쨍’ 산산조각 냈다. 그날 저녁만 해도 그랬다. 생일을 맞아 저녁에 깁스를 한 동생과 어렵게 외출을 해 근처 유명한 식당에 갔는데 한 프랑스 가족이 있었다. 뭐든지 다 나눠먹는 우리가 신기했던지 우리 쪽을 보며 그런 말을 하는데 자꾸 ‘중국인’ ‘중국인’ 하는 소리가 거슬렸다.


즐거운 생일 만찬. 나는 그들을 있는 힘을 다해 째려보았고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그들도 말을 멈췄다. 그날 아침, 알아듣지 못한 언어 속에서 느꼈던 평안함은 한순간에 날아갔다. 하지만 우리가 한국인인걸, 한국어를 못 알아듣는 그들이 어떻게 알았겠는가. 불어를 알아듣는 내가, 중국인이라고 말한 것에 분개한 것이지. 깁스하고 집에만 있던 동생의 몇 주 만의 외출이자, 생일날 화내는 나만 결국 손해인 것이다.


나는 원래도 예민하지만, 말에 유독 예민하다. 말 한마디에 절교한 관계도 있을 정도이다. 자꾸만 의도를 붙인다. 말을 그냥 말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의도로 마음으로 부풀린다. 그래서 말은 내게 늘 화살로 돌아온다. 말이 방패이자 무기인 사람이 여러 언어를 구사하는 건 축복이 아닌 저주인 셈이다.




파리로 돌아오기로 예정된 날, 계속해서 기차 문제가 발생했다. 첫 기차가 연착돼서 파리로 가는 기차로 못 갈아타고. 파리로 가는 다른 기차를 타기 위해 도시를 이동하면, 가는 도중 그 기차가 연착이 됐다. 하루 종일 기차만 타다 하루가 끝나갈 때쯤 동생 집으로 되돌아오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하루 종일 무거운 짐을 들고 기차역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안내 센터를 찾아 헤매고. 황금 주말에 기차만 타다 파리 집에 도착하고도 남을 시각에 동생 집으로 되돌아오게 됐지만. 이상하게 며칠 전 겨우 몇십 분 더 기다려서 다음 기차를 탈 때처럼 화나지 않았다. 아니 전혀 화가 나지 않았다.


알아듣지 못하는 웅성거림 안에서, 창밖으로 흘러가는 전경을 보며 결국 일어났을 일이라 체념했고. 체념하니 마음도 편해졌다. 기차여행을 한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은 포기도 빨랐다. 알아듣지 못하는 말과. 어쩔 수 없는 일. 그 사이에서 묘한 해방감을 느끼며, 알아듣고 이해하려고 애쓰는 게 얼마나 피곤한지 생각했다. 어쩌면 모든 걸 이해할 수 있다는 착각에, 사는 게 이토록 피곤한 건지도 모르겠다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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