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외부 미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지하철에서 습관처럼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 뉴스를 검색했다. 헤드라인에 '계엄령'이라는 글자가 보였고 그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직 뉴스를 제대로 보지 못했을 때라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전쟁이 났구나'였다. 전쟁이 아니라면 계엄령이 발표될 리가 없었다. 두려움과 불안으로 심장은 걷잡을 수 없이 뛰기 시작했고 한국에 있는 가족들 얼굴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전쟁. 어렸을 때부터 전쟁은 가까우면서도 먼 이야기였다. 분단국가라는 현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전쟁을 직접 겪어본 적은 없었기에 은연중 일어날 리 없는 일이라고 여기거나 평생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는데 현실이 된 것이다. 다행히 기사를 하나하나 읽어 나가기 시작하자 전쟁은 아니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지만, 안심하는 것도 아주 잠깐이었다. 전쟁이 아닌데 계엄령이라면 이건 뭔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되고 있었다.
'비상계엄령'. 광주에서 태어나 자란 나는 이 단어에 5.18을 떠올렸다. 그 사태를 겪은 세대는 아니지만 늘 차갑고 깐깐하던 중학교 사회 선생님이 교과서에 5.18이 사건이 나와 당시 이야기를 하던 중 그 이후 영영 돌아오지 못했던 자신의 대학 동기들을 언급하며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짓던 장면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돌아와 보니 그들이 평소 앉던 자리에는 국화꽃만 놓여 있었어. “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그녀의 얼굴은 친구들을 돕지 못했다는 미안함과 슬픔으로 일그러졌다. 하지만 누구도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주는 사람은 없었었다. 어쩌면 본인들이 직접 목격한 그 잔혹한 광경들을 아이들에게 이야기하는 자체가 끔찍한 일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한강 작가의 '소년의 온다'를 읽고 나서야 나는 선생님이 그때 왜 말을 잇지 못했는지 알 수 있었다.
어쩌면 그런 시대에 태어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여전히 말도 안 되는 일이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기는 해도 민간인을 잡기 위해 군인들이 동원되지는 않는 시대에 살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 안일한 생각이 착각이었음을 나는 12월 3일 저녁에 알았다. 저녁 내내 실시간으로 국회의 상황을 지켜보며 이것이 현실이라는 사실을 차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프랑스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너희 나라 괜찮아? 계엄령이라는데 전쟁 난 거야?'“ 전쟁이 아니라고 하자 그녀는 놀라는 목소리를 물었다. ”그러면 왜?“ 국가의 원수가 자신의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군대를 이용하고 국회에 쳐들어 갔다는 걸 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해 줄 수 있을까.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고 한국 음식을 즐겨 먹고 케이팝을 듣는 이들에게 이것도 한국이라고 말해줘야 할까.
다행히 190명의 국회의원들이 담을 넘어가면서까지 신속하게 국회로 모여 준 덕분에 비상계엄령은 9시간 만에 해제 됐지만 한 번 일어난 일이 두 번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었다. 아니 한 번 일어난 일이 두 번 일어날 때는 그보다 더 한 방식으로도 일어날 수도 있었다. 일이 한참 많고 감기 몸살에 시달렸지만 나는 그때부터 거의 실시간으로 뉴스를 보았다. 걱정이 돼서 새벽에 자다가도 일어나 뉴스를 보았고 눈을 뜨자마자 한국의 뉴스를 확인했다. 직장에서 만나는 프랑스 동료들도 한국 소식을 물었다. 이처럼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너희 나라 괜찮아?”라는 말을 듣는 건 20년 가까운 타지 생활 중 처음 있는 일이었다. 모두 “왜?”라고 물었다. 간략하게 이유를 설명해 주면 다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당연했다. 나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희망은 있었다. 토요일, 국회에서 예정된 투표에서 이 모든 사단은 끝이 나고 나라는 정상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한 번 심하게 아파봐야 건강의 고마움을 아는 것처럼, 이런 일이 있고 나서야 평화나 민주주의라는 단어들이 관념적이거나 추상적으로 들리지 않았다. 이 사건이 백신이 되어 훗날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우리 사회를 도와줄 거라 믿었고, 그 출발이 토요일 국회 투표가 될 거라 굳게 믿었다. 작금의 상황에서 어떤 정치인이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행동할 수 있겠는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남편도 나와 같이 매일 걱정을 하며 프랑스 언론의 기사들을 확인했지만 프랑스 언론에서는 대부분 표면적으로만 다루고 있었다. 그래서 남편에게 내가 수집한 정보들을 상세하게 말해주면 남편의 눈은 놀라서 커지며 마지막에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자신 있게 말했다. “그래도 괜찮아. 토요일에 투표 끝나면 곧 정상으로 돌아갈 거야.”
8명. 딱 8명만 있으면 되는데. 설마 그 8명이 없으려고. 토요일. 국회가 열리는 시간에 맞춰 컴퓨터를 켜고 실시간으로 시청했다. 여당 의원들이 보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무기명 투표라고 하니 설마 저 중에 찬성하는 사람이 없으려고. 첫 투표 결과를 발표하기 직전, 국회의장의 눈빛이 흔들리며 눈물을 삼키는 게 화면을 통해 그대로 전달되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부결이 발표되자 이루 말할 수 없는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곧 국민의 힘 의원들이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운명이 결정되는 투표를 앞두고 연이어 본회의장을 떠나고 있었다. 계엄령이라는 헤드라인을 처음 봤을 때보다 더 충격이었다. 저들도 똑똑히 보지 않았는가. 12월 3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국회의원이라면 아니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적어도 투표는 했어야 했다.
안철수 의원을 제외한 모든 국민의 힘 의원들이 자리를 뜨고 박찬대 민주당 원내대표가 그 자리에 없는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부를 때 안에서 솟구치는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갔다. 같은 시간 수십만의 시민들도 엄동설한에 떨며 그들의 이름을 불렀다. 영화라면 그들은 하나둘씩 돌아와야 했고 그래서 결국 해피엔딩으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영화가 아니라 현실이었다. 단 두 명의 의원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처음 계엄이 발표되고 그 정황들이 속속들이 드러나자 동생은 말했다. “영화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네.” 동생에게 말했다. “이게 영화라면 허접한 영화고 시나리오부터 까일 영화야.“ B급 영화에서조차 보기 힘든 광경을 지금 목도하고 있었다. 절망과 슬픔과 더불어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가 단전에서부터 치밀어 올랐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여태까지도 앞으로도 나는 한국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프랑스에 산 세월이 어느덧 한국에서 살았던 세월과 버금가기에 종종 프랑스인들이나 다른 교포들이 당연하다는 듯 묻곤 한다. “프랑스 국적 있지?” 그럴 때마다 없다고 하면 놀라는 표정을 짓곤 했다. 오래 살았고 사회에 잘 정착해서 살고 있으니 국적 신청을 하면 당연히 나올 텐데 없다고 하니 놀라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말했다. “저는 한국 사람이에요. 그걸로 충분해요.” 외국인으로서 국적이 있으면 해외에 사는데 조금 더 용이한 건 사실이지만, 내게 국적은 단지 사는데 편리하려고 얻는 그 훨씬 이상이었다. 프랑스에 살면서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내가 해야 할 의무와 권리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지만, 나는 단 한 번도 내가 프랑스인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프랑스에서 벌어지는 일들에는 가슴 아파할 수는 있었어도 지금처럼 뜨거운 눈물을 흘려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오후 집회 참석을 위해 에펠탑이 있는 트로카데로 광장으로 향했다. 며칠 전부터 심한 몸살감기로 밖에 나가기만 해도 온몸이 떨렸지만 이거라도 하지 않으면 더 아플 거 같았다. 지난 며칠 동안 해외에 있어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팠고 미안했는데, 다행히 파리에서도 집회가 열려 함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연세가 있으신 교민들이 많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오히려 20-30대의 젊은 친구들이 많이 보였다. 비도 부슬부슬 내리고 추운 날씨였지만 수백 명이 모여들었다. 그중에는 기차로 몇 시간 거리의 지방에서 온 이들뿐 아니라 밤 기차나 비행기를 타고 집회에 참여하기 위해 다른 유럽 국가에서 온 이들도 여럿 있었다. 다들 한마음이구나 싶었다. 우리는 알고 있었다. 이렇게 한다고 지금 당장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을 거라는 걸.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거 같아 이 추운 겨울날 각지에서 달려온 것이다.
모두 한마음으로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고 자유 발언을 했다. 자유 발언자들 중에는 유럽에서 교환학생이나 유학을 하고 있는 20대 학생들이 많았는데, 이들의 발언을 들으면서 나는 알게 모르게 내가 MZ 세대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뉘우쳤다. 이들은 깊은 생각을 장황하게 말하는 대신 심플하지만 핵심을 찌르는 어휘를 선택할 줄 알았고, 누구보다 현실적이었지만 그래서 자신이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집회를 위해 암스테르담에서, 영국에서 심지어 미국에서 온 이도 있었다. 70-80년대에 시위를 했던 세대가 상록수를 불렀다면 이들은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불렀다. '널 생각만 해도 난 강해져 울지 않게 나를 도와줘. 이 순간의 느낌 함께 하는 거야 다시 만난 우리의~‘ 떼창으로 경쾌하고 힘차게 부르는 이들을 보며 다시 희망을 보았다. 집회에 참석하기 전까진 마음에 돌덩어리가 짓눌렀다면, 집으로 돌아가는 발검음은 가벼웠다.
우리나라. 내 나라. 해외에 살다 보면 이 말이 얼마나 소중한지 잘 안다. 비록 내가 선택해서 타지에서 외국인으로 살고 있을지라도 항상 돌아갈 수 있는 내 나라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외로운 타지 생활을 견딜 수 있게 하는 근간이다. 코로나 때 내 의지와 상관없이 발이 묶이자 언제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었다. 해외에 나가면 다 애국자가 된다고, 우리나라에서 좋은 소식이 들려오면 더없이 자랑스럽고 기쁘다가 지금처럼 절망적인 상황에는 한없이 아프다. 이번 사태를 겪으며 두 가지를 명징하게 알게 되었다. 나는 영원히 대한민국 국민이며 그 외의 다른 나라 국민은 결코 되지 못할 거라는 것과 나라가 있어야 내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 위기를 현명하게 잘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이 한 글자가 더없이 소중한 나날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