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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멘딘 Oct 24. 2022

2. 괜찮은 하루이지 않았을까?

유학생활을 한지도 벌써 4-5년 차가 된다(물론 그 사이에 코로나 때문에 1년 반 정도는 한국에서 지냈지만). 처음으로 혼자 살다 보니 나 자신이 아니면, 나만큼 잘 챙겨주는 사람이 없는 것이 타지 생활이기에 흐트러지지 않게 살려고 애를 꽤나 썼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이쯤 되니 스스로 통제하면서 사는 것에 퍽 지친 것 같다. 요즘은 나를 편하게 해주는 쪽으로 지내고 있다. 스스로를 너무 통제하고 절제하는 것보다는, 하고 싶은 일을 먼저 하고 먹고 싶은 음식에 돈을 쓰는 자유 정도를 허락해주고 있다. 통제된 삶에 성공하지 못해서 느끼는 좌절감이나 우울감, 자기혐오보다는 이렇게 지내는 방식에서 적당한 에너지를 얻는 것 같다. 삶의 방식에 정답이나 옳고 그름은 없다고 생각하기에 본인이 행복하면 된다고 생각한다(스스로에 대한 통제가 많이 풀어진 느낌이다).


그럼에도 살아온 습관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갑자기 뜻밖의 변수를 맞닥뜨리게 되면 당황하게 된다. 오늘도 들고 온 짐에 비해 꽤나 가벼운 오후를 보냈다. 이쯤 되면 그냥 무거운 가방을 메야 안정감을 느끼는 건가 싶기도, 일종의 자기 합리화 같은. 어쨌든 그때 당시에는 시간을 잘 보냈으면서, 돌이켜 볼 때 '오늘 내 계획은 이게 아니었는데'하면서 뒤늦은 합리화를 하는 이상한 습관이 있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나는 어쨌든 해야 할 일을 제때 못 끝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러려니 넘겨도 된다는 걸 알면서도 매번 느끼는 당혹감은 어쩔 수가 없다. 뜻밖의 커피 마실을 즐겨버린 나는 머릿속으로 다음 계획을 짜느라 정신이 없다. 친구에게 '어쩌다 보니 그냥 마실 나온 여자가 되어버렸어'라고 허탈하게 말했더니, 의외로 친구는 '그래도 괜찮은 하루이지 않을까?'라고 화답해줬다.


생각해보면 오늘은 공강이었고, 오랜만에 비가 오지 않는 맑은 날씨였고(싱가포르는 슬슬 우기로 넘어가서 비가 안 오는 날이 귀하다), 가고 싶었던 카페가 마침 학교 근처였고, 마침내 도착해서 좋은 서비스를 누렸다. 책도 읽었고 자료 사진도 틈틈이 찍었다. 저녁은 가보고 싶었던 라멘집에 가서 한 그릇 뚝딱 해치웠다. 집에 돌아와서 교수님께 수정된 아이디어 이메일을 보냈고, 해야 할 일들을 다듬었다. 생각해보면 하고 싶었던 일들을 꽤 많이 한 하루였고, 해야 할 일도 그럭저럭 해치운 하루였다. 그러니 친구가 보낸 답장처럼 '괜찮은 하루이지 않았을까?'에 동의할 수밖에.


늘 그래 왔듯, 어차피 모든 일들을 해치울 나다.

조금은 뻔뻔하게 괜찮은 하루들을 쌓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삶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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