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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뤼미나시옹 Sep 16. 2020

드릴 머신

프란티셰크 쿠프카


František Kupka - The Machine Drill [c.1927-29]


   내가 만지는 수많은 공산품들, 온갖 상품들. 책이며 커피 알약 돋보기 휴지 음료수 등등... 수많은 공산품이며 식품들이 내 손과 입에 몸에 머리에 발끝에까지 닿을 때까지 각각의 물건들을 만진 손에 대해 생각한다. 커피나무를 심고 커피나무를 키우고 열매를 채취하고 씻고 말린 손의 노동. 포대에 담고 트럭에 싣고 항구에 도착하고 나서 선적하고 바다를 건너고 다시 항구에 닿고 커피 포대가 옮겨지고 분류하고 봉지에 담기고 1킬로 그램의 커피콩이 내 집에 도착할 때의 마지막 택배 배달원의 손에 까지..... 그 많은 수고들.... 그러고 보면 우리 모두는 각자의 수고를 서로 나누며 사는 것이다.  기계가 원석을 갂아내고 광물을 캐고 철판을 구부리고 플라스틱 사출을 하고 옷감을 짜고 신발을 깁고 공책을 만들고 종이에 인쇄를 하는 온갖 것 수 십만 종의 물건들 하나하나에는 노동자의 손길과 기계의 힘이 함께 한다. 그 무엇도 소중하지 않은 게 없고, 그 무엇에도 비교할 수 없이 숭고하다. 그런 노동의 가치를 함부로 폄하해서는 안된다. 세상 모든 것들은 생산에 관여한다. 햇살 한 줌을 움켜쥐고 있는 나뭇잎에게 조차 생산에 관여한다. 반대급부로 비 오는 창가에 하염없는 침묵 중에 문장을 쓰는 사람. 모든 예술가들도 혹독한 노동자이다. 아주 혹독하고 가혹한 노동자이다. 마치 드릴 머신 같은 노동자. 그칠 수 없는 나날의 반복을 마다 하지 않고 겪어내고 살아가는 노동자. 이 세상 모든 것은 다 연결되어 있다. 고립무원의 자기 방에 갇혀 있는 히키코모리 조차 세상 어느 한 구석과는 분명 연결되어 있고 소통하고 있다. 모든 것들이 하나이며 다자이고 전체이자 부분이며 총합이자 개체이다. 노동하는 것은 지독한 진리이며 숭고한 운명이고 아름다운 움직임이며 자기 소멸의 고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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