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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창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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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뤼미나시옹 Jan 21. 2024

창가에서 ㅡ 옛사람

 옛사람



 옛사람이 된 지 오래, 죽을 준비는 하는 건가. 산 아래 빈터에 차를 세우고 생각한다. 죽을 준비를 하는 것. 바리깡을 샀다. 충전을 하고 손에 쥐었다. 윗 옷을 벗고 겨울나무 그늘에 숨어 삭발을 감행했다. 머리를 제 손을 깎는 것, 그것 웃기는 일이기도 하거니와 뭔가 비장한 마음이 일어나기도 한다. 굳이 어떤 마음의 경이로움을 느끼고 싶었거나 심각한 심경의 변화가 일어나서가 아니다. 단지 머리카락이 짐스러웠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보이는 내가 아니라 내가 보는 나의 짐스러운 것이 얼굴에 가득했고 머릿속에 가득했다. 마른 수건을 한 장 옆에 두고 말끔하게 머리카락을 잘라냈다. 오른손 왼손을 번갈아가며 삭발을 했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될 정도로 두상을 만져가며 빈자리 없이 모두 밀어냈다. 그리고  흩어진. 머리카락을. 보았다. 죽은 것 같았다. 아니 죽어 있었다. 이것이 나구나!! 별 것 아니구나.

 옛사람이 된 지 오래, 죽을 준비는 하는 건가. 낡고 바래고 희미한 생을 살아도 되겠다 싶었다. 아무래도 괜찮다, 잊히는 사람, 별에서는 보이지만 이웃에게는 보이지 않는 사람, 먼 별에서는 보이지만, 그 사람에게서는 잊히는 사람, 그들에게서는 보이지 않는 사람이, 그곳에서는 증발해 버린 사람, 멀고 먼 별에서는 보이지만 그 바다에서는 물결무늬가 된 사람, 그 바다에서는 파도자락을 일으킨 바람이 된 사람, 겨울나무가 밤의 흐림 속에 잎새 하나 없이 서 있듯이, 사는 사람, 희미하고 바래면서 잊히는 것을 마다하지 않을 삶.

 옛사람이 된 지 오래, 바래 책들 속에 줄 친 문장들을 다시 이해하려 하고 있다. 오래된 책들을 정리하면서 누렇게 변색한 책들의 먼지를 일으키면서 창가에서 먼지들이 보여주는 문장을 읽으면서, 그 시절에 내가 얼마나 치열하고 경이로운 삶을 살았는지 내가 나를 진심 느껴진다. 초판의 책들과 지금 나의 사이 큰 공백 같은 빈자리에 내가 보이는 것이 아닌가, 내가 잘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앞서 나는 그렇게 살았구나 하는 흔적, 흰 종이 김치국물 떨어져 누레진 세월 같은 흔적 안에 내가 살았구나 하는 생각.

 옛사람이 된 지 오래, 머릿속에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찾고 또 찾는 사람이 있는데 아무리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찾아도 도무지 그 실마리가 없는 사람 소식도 전화번호도 주소도 근처도 없는 사람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중이다. 마치 내 머릿속은 소설가 욘 포세의 문장들처럼 끊임없이 반복하고 또 반복하면서 그 사람을 생각한다. 인생에 단 한 사람을 찾아다니고 기대한다는 것, 그건 옛사람이나 하는 방식 아닌가. 죽은 외삼촌이 꼭 그렇게 살았다. 평생을 떠돌며 맨 처음의 여자를 찾아다니다 위암으로 죽었다. 하지만 나는 떠돌지는 않을 것이다. 이 자리에서 맴돌다 미쳐버리는 것을 선택하기도 했다. 제자리에 뱅뱅 돌며 '너'를 생각하고 떠올리며 빈자리에 '시'를 채워 넣고 어쩌면 너 보다 더 오래 살면서 어쩌면 너 보다 더 일찍 정신머리가 나간채...,

 옛사람이 된 지 오래, 바래가는 생에는 바래가는 옷을 입어야지. 새것에 미치도록 질리고 있다. 몇 해 전 마트에서 판 일만 원짜리 후드티를 입고 또 입고 바래서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잿빛의 질감이 내 피부 같다는 느낌, 고향의 공기 같다는 느낌, 먼 곳에 있었던 옛사람의 숨결이 스며 있다는 느낌, 무엇보다 나는 이제는 바래고 있다는 좋은 느낌, 편한 느낌, 더 새로울 것이 없어졌다는 편안한 느낌, 더는 가파른 숨을 쉬고 싶지 않다는 느낌, 내가 한 세상의 한 구석이 되고 있다는 느낌, 나무에게도 꽃에게도 파도나 숲길에 위로를 받지 않아도 편안해졌다는 느낌, 내가 바래고 희미해지고 희끄무레하고 낡은 옷을 입고 걷다가 증발해 버릴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 정말, 아무 때고 예고 없이 희미한 발걸음으로 세상에서 증발해버리고 싶은 생각, 나는 정말 옛사람이 되고 있다는 긍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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