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안톤 Oct 25. 2020

엉덩이 30대 맞고 먹었던 오징어 라면

서툴지만 따스한 정이 그리운 날

엎드려!

퍽! 퍽! 퍽!

체력 좋고 깡 좋은 스무 살이었지만 야구배트로 엉덩이를 맞는 것은 허리까지 찌릿할 정도의 엄청난 고통이다.
처음에는 홈런을 치는 타자처럼 머리 뒤에서 부터 크게 휘두르며 내리치기 시작했다.
순간 엉덩이가 얼얼해지다가 이내 밀려오는 고통에 아파할 틈도 없이 또 한 번 크게 휘두른 방망이에 고통이 차곡차곡 누적된다.
그렇게 한대, 두대 맞던 것이 열대가 넘어갈 무렵부터 때리는 자와 맞는 자의 인내심 싸움이 시작된다.
엎드려 있던 나는 주장 언니가 일어나라고 할 때까지 한 번에 쉼 없이 맞아야 하고, 주장 언니는 숨이 차고 팔에 힘이 빠져도 약속한 서른 대를 모두 때려야 한다.
그렇게 어느 늦은 저녁, 주장 언니와 나는 합숙소 뒤 체육관에서 땀과 눈물을 쏟아냈다.


그날의 일로 인해 나는  대학 들어와서 맞은 엉덩이 빠따(몽둥이로 엉덩이를 맞는다는 의미)의 최고 기록을 경신하였다.  
주장 언니는 들고 있던 야구배트를 바닥에 내동댕이 치듯 던지며 가뿐 숨을 몰아쉬었고, 나는 일어나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엉덩이를 두 손으로 감싸고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고향이 인천인 나는 대학 축구부 입단을 위해 일가친척 하나 없는 울산으로 가게 되었다.
낯선 환경과 엄격한 규율에 적응하기도 전에 향수병과 사춘기 비슷한 무언가가 찾아왔다.
집에 가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합숙소는 나가고 싶었고, 반항하고 덤빌 생각은 없지만 말은 듣기 싫은 상태가 된 것이다.
오랜 속앓이 끝에 자취하고 있던 일반 학생 친구 집에 기거하며 3일간 잠수를 탔다.
늘 소원하던 늦잠을 자고 방에서 뒹굴며 TV 보다가 지루하면 만화책을 봤다.
그렇게 잠시나마 여유롭고 평화로운(?) 휴식을 취한 뒤, 곱게 숙소에 복귀해서 열심히 운동할 생각이었다. 멀리 인천에서 온 가여운 신입생의 귀여운 일탈로 봐주겠거니 하는 근거 없는 자신감도 함께.

3일 만에 복귀한 합숙소는 발칵 뒤집어져 있었다.
합숙소를 무단으로 이탈했기 때문에 학교 측에서는 일주일 안에 복귀하지 않으면 특기생 자격 박탈 또는 최악의 경우 퇴학조치를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상태였다.
그런 상황을 알 리 없는 나는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합숙소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빨랫감을 들고 나오던 동기가 거실에 서있던 나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언니!! 왔어요!!!”

그 소리에 놀라 눈알만 이리저리 굴리고 있으니 주장 언니가 한 손에 야구배트를 들고 방에서 나왔다.
동기들과 선배들도 내가 서있는 거실로 하나 둘 나왔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데리고 체육관으로 향했다.

‘역시.. 곱게 넘어가 주는 건 아닌가 보다.. 몇 대 맞고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주장 언니는 나에게 어디 가서 무엇을 했는지 전혀 묻지 않았다. 내가 없는 3일 동안 모든 축구부원이 저녁마다 나를 찾아 이곳저곳 헤매고 다녔다는 것도 말하지 않았다.
다만 합숙소 무단이탈로 퇴학을 당할뻔했다는 것과 환경이 바뀌어 마음이 어수선한것은 한 번씩 겪는 일이니 다시는 그러지 말라는 주의만 주었다.
그러나 숙소 내 기강을 위해 그냥 용서해줄 수는 없으니 속 썩인 대가로 하루에 10대씩, 총 30대만 맞자고 했다.




걸을 수가 없을 정도로 멍이 들어 다음날은 훈련에서 제외되었다.
아침 일찍 숙소에 들린 감독님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렸다. 당분간은 훈련하지 말고 숙소에서 쉬며 반성하고 앞으로는 열심히 운동만 하라는 짧은 말씀을 하고 돌아가셨다.
이상하리만큼 다들 내게 화를 내지도, 욕을 하지도 않았다. 어색한 기운은 있었지만 한 성격 하는 선배들도 질책하거나 눈치를 주지 않는 것이다.


그날 오후 기름에 호떡 부풀듯 잔뜩 부어오른 시커먼 엉덩이를 까고 거울을 보며 연고를 바르고 있는데 누군가 노크를 했다.
주장 언니가 한쪽이 살짝 찌그러진 은색 스테인리스 쟁반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몸을 돌려 낑낑대며 약을 바르던 나를 보더니 이내 들고 있던 쟁반을 내려놓았다.
내손에서 연고를 뺏어 엎드려보라고 했다.  

“괜.. 괜찮습니다...”
“시끄러워.. 빨리 엎드려”

“시커멓게 된걸 보니 좀 있으면 멍 빠지겠네.”
“식당 할머니가 주신 호랑이 연고를 바르니 금방 낫는 것 같습니다”
“그거 매일 발라야 돼”

그런데 아까부터 내 코를 자극하는 강렬한 향이 있었다.
‘아...! 라면이다!’

운동선수에게 인스턴트 음식과 설탕은 금기다. 과자, 빵, 탄산음료, 라면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과자나 빵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라면은 일주일 내내 먹을 수 있을 만큼 좋아한다. 휴가를 받으면 제일 먼저 달려가는 곳이 라면을 파는 분식집일정도었다.
노란 양은냄비 뚜껑으로 가려있지만 이것은 분명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오징어 라면이다. 그 라면이 지금 내 눈앞에 하얀 연기를 모락모락 내뿜고 있다.
내가 라면 냄비를 뚫어져라보고 있는 걸 주장 언니도 눈치챈 모양이다.

“너 오징어 라면 환장한다며? 이거 네가 좋아하는 라면이니까 어서 먹어”
“언니.. 라면 먹어도 되나요?”
“먹기나 해..”
“언니도 같이 드세요”
“난 됐어. 라면 안 좋아해. 먹고 문 앞에 놔둬. 난 간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건넬 틈도 없이 주장 언니는 방문을 쾅 닫고 나갔다.
나는 엉덩이의 통증도 잊은 채 허겁지겁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내가 오징어 라면을 제일 좋아하는걸 어떻게 알았지? 어라? 오징어도 더 넣어주셨네!’
‘찬밥에 김치랑 단무지까지... 주장 언니 센스는 있는 사람이었구나’

배부르게 라면을 먹고 나니 잠이 스르르 왔다.
그렇게 ‘엉덩이 부상’으로 일주일 동안 방에서 격리당한 나는 매일매일 주장 언니가 끓여주는 오징어 라면을 배부르게 먹었다.

전국체전이 끝나고 공식적인 모든 시합이 종료되었다.
주장 언니를 포함한 선배들의 퇴소일이 결정 났다. 저마다 진로가 결정된 선배들은 하나 둘 짐을 챙겨 나가기 시작했다.
어느 날 주장 언니가 나를 찾는다는 말을 듣고 방으로 들어갔다. 주장 언니는 한쪽 끝에 자물쇠가 달린 오래된 서랍장을 작은 열쇠로 열더니 가까이 와보라고 손짓했다. 그 안에는 내가 좋아하는 오징어 라면이 수북하게 쌓여있었다.

“너 숙소 뛰쳐나갔다가 들어와서 나한테 맞은 거 기억나?”
“아.. 네 기억하죠”
“감독님 하고 2학년 선배들하고 너 들어오면 가만 안 둔다고 난리도 아니었어”
“근데 저한테는 아무 얘기도 안 하시던데요”
“감독님한테 너 오면 내가 잘 타이를 테니 혼내지 말아 달라고 하루 종일 사정했었어. 2학년들도 따로 불러서 설득하느라 애먹었다.”
“......”
“너처럼 예민한 애가 울산에서 지내는 게 얼마나 답답했을까 싶기도 하고, 나도 1학년 때 도망가려고 짐 싼 적 있어서 그때 생각도 나고 그랬어”
“감사합니다.. 몰랐어요. 일주일 동안 라면도 직접 끓여주시고.... 연고도 매일 발라주시길래 그냥 때린 게 미안해서 그러시는 줄 알았어요...”
“이제 후배들도 들어올 거니까 잘해주고.. 숙소 생활 힘들면 여기 라면 꺼내서 하나씩 먹으면서 버텨라”

그렇게 서랍장 열쇠를 내게 툭 던지고 선배는 방을 나갔다.
눈물이 났다.
감독님과 선배들이 혼내고 괴롭힐 것을 걱정해 본인이 자처해서 나를 심하게 때린 것으로 무마시킨 것이다.
며칠 동안 동기들은 병문안 오듯 내 방을 오가며 주장 언니가 그렇게 독할 줄은 몰랐다고 욕을 한 사발씩 했었다.
덕분에 내가 잘못한 일은 자연스럽게 묻혔다.
그런데도 마음 여린 주장 언니는 매일 멍이 빠질 때까지 손수 라면을 끓여주며 사과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생각보다 입이 무거운 식당 할머니 덕분에 호랑이 연고도 주장 언니가 전했다는 것은 내가 졸업하기 직전에 알게 되었다.



전쟁터와 같은 회사생활에 몸도 마음도 지쳐있었다.
매일 반복되는 결론 없는 회의를 하루에만 세 차례 치르고 파김치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꼬르륵’
회사에 있을 때는 조용하더니 그래도 집에 왔다고 눈치만 보던 배꼽시계가 요란하게 울렸다.
찬장을 열고 손으로 뒤적거리자 라면 한 봉지가 손에 잡혔다.
오징어 라면이었다.
냄비에 물을 담고 가스레인지에 불을 올렸다.  
물이 끓자 건더기 스프와 면을 넣고 분말스프를 털어 넣었다.
오징어 라면 특유의 향이 주방을 가득 채웠다.
그 옛날 은색 스테인리스 쟁반에 노란 양은냄비를 들고 오던 주장 언니가 생각났다.
의지할 곳 없던 타지 생활에 주장 언니는 큰 힘이 되었다.
힘내라는 말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양은 냄비에 라면 하나 끓여 툭 밀어주고 가는 것이 전부였다.
그렇게 주장 언니 나름의 방식으로 위로를 건네고 있었던 것이다.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엉덩이가 아닌 마음을 맞을 때가 많다.
말로 받은 상처라 호랑이 연고를 바를 수도 없다.
오늘따라 유독 진하게 느껴지는 오징어 라면의 향이 그 시절 주장 언니의 서툰 위로를 그립게 한다.

작가의 이전글 행운도 불운도 결국 운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