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kelvinstyle
Mar 16. 2024
99년 T사의 지사장이 되었다.
지방영업 총괄이사님과 첫 대면이 있었다.
이런저런 시황과 업계이야기, S사에서 T사로 이직한 이유와 목표 등을 질문하셨고 무난하게 대화를 나누며 브랜드를 바꾸어 영업하는 것이 쉽지 않으나 잘 하리란 기대를 갖고 있다시며 건강한 부담감도 주셨다.
대화 말미에 지사장이 꼭 해야 할 것이 있다고 하셨다. 골프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음 날, 지사 근처 골프연습장을 찾아 3개월 회비를 내고 골프레슨을 시작했다. 난생처음 잡아보는 7번 아이언의 그립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양 발을 어깨너비만큼 벌리고, 무릎은 살짝 구부려 기마자세 비슷하게 잡고, 허리를 곧곧히 세워 살짝 앞으로 숙이고,
목선도 허리선에 맞춘 상태에서 왼 눈으로 골프공 후사면을 바라보고, 양손은 삼각형 구도로 아이언을 잡고 어드레스 셋업을 하는 기본동작 또한 낯설기 짝이 없었다.
셋업자세에서 7번 아이언으로 공 없이 '똑딱이 동작'을 수없이 반복하는 과정은 지루하기 그지없었다.
티칭 프로는 이 기본동작을 일주일간 한다고 했다. 공도 없이, 빈 스윙만...
군대에서 PT동작할 때 핵심역량은 '무념무상'으로 동작에 몸을 맡기는 것이었고 '잡생각금지'이었으므로 잠깐 군대 다시 잡혀갔다 생각하고 일주일을 연습했다.
출근해서 사무실 들어가기 전, 외근이 없는 점심시간에, 퇴근 후 1일 2~3회 연습장에서 살았다.
일주일 뒤, 프로가 새하얀 골프공을 놓아주었다. 똑딱이 타법으로 이제는 공을 맞추라는 것이었다.
기분이 좋았다. 드디어 공을 치는구나!
유격훈련 때 81번 올빼미에서 훈련이 끝나고 수료식 때 계급장 달린 군복 갈아입는 것 같은 기분과 흡사했다.
어라? 공이 하나도 안 맞았다.
요행히 맞으면 좌탄, 우탄. 겨우 일직선으로 가는 공은 데굴데굴...
세일즈 현장에서 열심히 세일즈 스피치를 하는데 고객의 산만한 반응과 흡사했다.
'골프. 참 예민하고 어려운 운동이구나!'
그때 알았다.
골프는 기본동작이 너무나도 중요하고 한 번 익힌 스윙동작은 평생을 간다는 것을.
그리고 그 이후, 한 주먹에 쏙 들어오는 작은 골프공 하나 치기 위해 배워야 할 것이 무궁무진하게 많음을 알게 되었다.
세일즈를 처음 시작했을 때 큰소리로 '안녕하십니까?' 인사 연습하고 고객에게 명함 건네고 받는 자세, 테이블 미팅을 유도하기 위한 관찰과 제안화법 및 동작 롤 플레잉이 평생의 세일즈 역량을 좌우하는 것과 닮아있음을 깨달았다.
골프연습 입문 삼 개월이 지났다.
서툰 스윙동작과 거리감 없는 퍼팅으로 무장한 나는 대리점주 연합회 초청으로 일명 '머리 올리기'를 했다.
생애 처음 나선 골프장 1번 홀 첫 드라이버 스윙을 맞이하였다. 잔디는 초록초록 푹신하게 사방에 툭 트인 채 깔려 있었고 봄날 햇살도 따사롭게 내려 더할 나위 없이 상쾌한 날이었다.
인터넷 동영상에서 본 잭 니클라우스의 스윙을 상상하면서 새로 구입해서 필드에서 비닐을 벗긴 캘러웨이 드라이버로 회심의 첫 스윙을 힘차게 했다.
'나이스 샷!'
아니고
'뚝!!!'
드라이버가 부러졌다. 헤드가 골프 공인 양 이미터 앞으로 굴러갔다. 망했다.
생애 첫 샷을 새로 산 드라이버 박살 내는 것으로 시작한 것이었다. 창피하고 무안했다.
대리점 사장님들은 괜찮다 하시며 위로의 말을 건네시고 골프장에서 드라이버 하나를 대여해 와서 건네주셨다.
그날, 어떻게 18홀이 지났는지 모른다.
스코어는 108개. 이유는 수없이 많이 공을 쳤지만 머리 올리는 날은 번뇌가 많은 날이므로 입문자의 스코어는 불교에서 이르는 '인생의 백팔가지 번뇌'를 차용하여
108개로 적는다 했다.
맞다! 골프를 하면 온갖 생각이 몰려온다. 세일즈 전략 생각이 아니고, 오직 공을 맞추고 방향과 거리를 맞추고 러프와 샌드를 탈출하고 그린에 올리기 위한 수십 가지 어프로치 기술들에 대한 생각뿐이다.
목표는 그 비싼 돈을 내고 골프를 치는 데, 가급적 공을 치는 횟수를 줄이기 위한 것이 미덕이니 가성비로 따지면 어이가 없는 운동이다.
세일즈 활동에서 반드시 대량방문이 대량오더로 이어지지는 않는 것처럼 예리한 타겟팅과 민감한 동작으로 One Shot One Kill 하듯 골프도 한 타 한 타에 신중을 기울이는 것이 스코어를 줄이는 핵심임을 알게 되었다.
이후, 고객과의 관계를 긴밀하게 가져가기 위한 목적으로 골프 라운딩을 많이 하게 되었다. 골프 초대를 받기도, 고객을 초대하기도 하면서 108 번뇌 스코어에서 100타를 깨고 90타를 깨고 80타를 깨서
세 번의 이글과 한 번의 싱글도 해보았다.
지금은 다시 백돌이가 되어 있다.
최근 2년간 골프를 할 수 없는 회사문화와 경제적 사정과 동반자들의 부재 때문이다.
골프는 마치 인생여정과 흡사하게 닮아있다.
때로는 길게 때로는 짧게 공을 보내고, 가다 보면 평지도 있고 경사도 있고, 물도 만나고 모래도 만나고, 수월하게 그린에 공을 올렸는데 홀컵까지 넣는데 세 번 네 번 퍼팅을 하고, 그린 주변에서 어프로치를 했는데 골프공이 안 보여 한참을 찾았더니 홀 컵 안에 들어가 있는 운 좋은 이글도 한다.
골프는 인생여정이고 세일즈여정 같다.
전반에 공을 많이 쳐도, 후반에 버디와 파를 기록하며 스코어를 줄이는 날도 있고 운동 내내 뒤땅만 치다 허리가 나가서 엠뷸런스 불러서 실려가는 경우도 있다.
기본기로 단단히 무장하고 임해야 하는 운동이고, 잘 풀릴 때나 안 풀릴 때도 '잡생각' 하지 않고 머리 들지 않고 '꾸준함'으로 승부하면 좋은 결과가 나오는 정직한 운동이다.
삶도 그렇다. 세일즈도 그렇다.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은 침대 매트리스가
아니라 골퍼의 머리와 몸의 축이며
인생여정을 걷는 나의 자존과 가치관이다.
바람이 비가 구름이 환경을 어지렵혀도 눈 크게 뜨고 셋업 어드레스 단단히 잡고 가고 싶은 방향에 충실하게 나의 스윙에만 집중하면 된다.
똑딱이는 나이스샷을 만들고,
세일즈 프로세스 루틴은 세일즈의 그 성과를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