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uffyeon Oct 05. 2022

21년의 여름

 25년 살면서 대구를 처음 방문했다. 스무 살 무렵 우리는 대전, 대구, 천안으로 각각 뿔뿔이 흩어졌다. 공시를 끝낸 b와 오랜만에 모이기로 한 우리는 대구에서 만났다. 나는 돈을 아끼겠다고 버스를 탔는데 4시간 30분 동안 불편한 자세로 갇혀있던 것보다 옆에 앉으신 할머니께서 쉴 새 없이 말을 거셔서 힘들었다. 거절을 절대 못하는 나는 할머니의 풀 인생 스토리를 들을 수 있었고 하물며 할머니의 지인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4시간 30분 동안 이야기를 듣다가 대구에 도착한 나는 기가 모두 빨린 상태로 오랜만에 친구들을 마주했고 동성로 시내를 돌아다니다 그냥 이 길바닥에서 누워 자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첫날은 그렇게 비몽사몽 지나갔다. 광주에서 태어나 파주에서 살고 있다는 할머님. 친한 친구를 보러 자기도 대구에 처음으로 놀러 간다던 할머니. 생각해보니 난 할머니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이름도 모르는 사람의 인생을 이렇게 세세하게 들을 수 있다니. 할머니는 내 눈이 참 착하게 생겼다고 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 옆자리에 앉게 되어 다행이라고 말했다. 할머니의 처녀시절 사진도 볼 수 있었다. 자신에게 딱 맞는 기성복을 입으며 친구와 함께 카메라를 응시하는 할머니는 예쁘게 웃고 있었다. 군인과 결혼하였고 자신의 남편은 싫지만 군인과 결혼하는 것은 좋은 것이라며 나에게 열변을 토하던 할머니. 나는 지금도 할머니를 할머니라고 지칭할 수밖에 없음이 아쉽다. 당신의 이름을 알고 싶다. 이름으로 부르고 싶다.




 둘째 날 , k가 제일 먼저 눈을 떴다. 우리는 오늘 하루를 어떻게 하면 잘 보낼 수 있을지에 골몰했다. 하지만 나와 b는 이곳이 거의 처음이었으며 k는 어마 무시한 집순이다. 우리는 계속 고민하다 수성못에 가기로 했다. 수성못은 생각한 것보다 더 컸다. 하늘이 예뻤고 빛나는 윤슬이 예뻤다. 나는 더위를 무척이나 싫어하지만 시간이 지난 뒤 기억에 남아있는 여름은 무척이나 빛난다. 여름은 유독 하늘이 정말 예쁘고 햇빛에 반사되어 온갖 것들이 빛나는 계절이다. 그날 우리가 본 수성못도 그랬다. 근래 본 하늘 중에 가장 예뻤고 거대한 호수는 반짝거리는 윤슬과 함께 빛났다. 나는 그날 태어나서 처음으로 오리배를 타봤다. 무더위가 잠잠해지는 시간에 우리는 우리의 오리 안에서 거대한 호수를 누볐다. 선선한 바람과 말도 안 되게 아름다운 노을. 나는 자주 아름다운 하늘보다 모두 함께 멈추어 그 하늘을 찍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더 예쁘다고 생각했다. 이 풍경을 아무리 카메라에 담아보아도 제대로 담아지지 않았다. 한참을 카메라에 담다가 포기하고 그저 바라보았다. 이 아름다운 풍경을 우리는 우리 방식대로 마음에 새겨놓았다.



 하루 만에 익숙해진 k의 집으로 돌아와 마시고 싶었던 와인을 함께 마셨다. 술을 죽도록 마셔야 성에 차는 나와 달리 k와 b는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혼자 아쉬워 캔맥주까지 마시고 각자의 자리에 누웠다. 금방 잠에 든 k와 달리 b와 나는 잠에 들지 못했다. 우리 둘은 수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동안의 연애와 수많은 관계, 틀어진 친구들, 후회되는 마음과 고마운 마음 그리고 각자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 나는 내가 사랑하는 아이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에 대해 토로했다. 내가 그 아이를 사랑한다는 마음이 얼마나 나를 버겁게 만들고 얼마나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지. 이런 감정이 날 얼마나 유치하게 만들기도 하며 나를 사람답게 만드는지에 대해.



 그 아이가 진심으로 행복하기를 바라. 지금의 나에겐 그 바람이 무엇보다 중요해. 나이를 먹을수록 이별이 익숙하게 될 줄 알았어. 오히려 어릴 때보다 이별에 더 겁을 먹는 것 같아. 자주 무서워서 견딜 수 없어.


 


 그리고 난 이런 이야기를 너와 노인이 되었을 때도 함께 나누고 싶어.




 새벽 5시까지 나눈 대화 속에는 사랑만 있지 않았다. 누군가에 대한 경멸과 불안과 우울함까지도 있었다. 요즘은 괜찮냐고 물어봐주는 b에게 솔직한 마음을 말했다. 누군가에게 속마음을 처음으로 말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할 때 즈음에 b는 울고 있었다.


제발 죽지 말고 살아줘, 사라지지 마. 지연아.


나는 금세 후회했다. 가장 소중한 사람을 잃어 본 적이 있는 너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한 걸까. b의 어깨가 떨린다. 난 그 어깨에 대고 속삭였다. 너희가 살아있는 이상 나는 절대 죽을 수 없어. 그러니까 오래 이렇게 함께 누워있자.


그렇게 우는 너의 팔을 잡고 함께 울었다. 우리의 울음소리에 깬 k는 k만의 방식으로 우리를 또다시 웃게 만들었다. 난 늘 그런 k도 b도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방에 새벽빛이 조금씩 들어올 무렵, 나는 우리가 무사히 노인이 되는 상상을 했고 그 미래를 진심으로 바랐다. 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불확실만이 우리의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삶을 잘 견뎌내기를 바랐다. 불행이 도처에 깔린 삶 속에서 나의 삶의 일부인 여자들과 함께 늙어가고 싶다. 나는 너희를 위해 환경운동가가 되기도 하고 사회운동가가 되기도 한다.



내 연약함을 단단한 사랑이라 믿어주는 친구들이 있어서 난 오늘도 밥을 먹고 책을 읽으며 가슴 깊은 곳의 떨림을 느끼다 잠에 든다.


사랑이 명사가 아닌 동사임을 너희로 하여금 다시 깨닫는다.


​​


그리고 우리는 다시 헤어졌다. 이제는 내가 서울로 올라갔으니, 서울, 대전, 대구로 뿔뿔이 흩어졌다. 우리가 다시 만날 때엔 아마 장마일 수도 있고 가을의 초입일 수도 있다. 어느 계절이든 우리가 다시 만날 때엔 시답잖은 이야기로 웃고 각자 새로 생겨난 슬픔과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다 잠에 들 것이다. 누가 더 바보같이 웃는지 대결하면서, 각자를 웃기기 위해 최선을 다 하면서. 밤새 가장 많이 웃다가 각자의 꿈을 꿀 것이다.



2021.06.23

작가의 이전글 9월 19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