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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모작 Jun 16. 2023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당신은 쓸모 없지 않습니다

기적과 감동을 추리하는 치유책(策, 冊)이 되다


학창시절,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소설을 잔뜩 사서 한 권씩 도장 깨기를 했던 날이 떠오른다. 지금은 살짝 오래돼서 새 책들 같진 않지만... <악의> <방과 후> <옛날에 내가 죽은 집> <예지몽> <변신> 등등. 참 추리소설 잘 쓰는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는 내게, 그리고 모든 독자에게 추리소설의 대명사적인 작가였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읽게 된 후부터는 자연스럽게 그가 추리소설의 대명사라는 고정관념은 어느샌가 아리송해졌다. 그가 써내려간 이야기들의 겉모습은 대개 추리소설의 장르를 하고 있지만 페이지를 넘기고 그 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느껴진다. 갈등과 범죄가 난무하는 이 혼란스러운 이야기의 시작은 결국 다 우리 인생사에서 벌어지고 있는 아주 평범한 일들에서부터였음을.


왜 우리는 잔혹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릇된 행동에 용납을 바라는 것은 아니고 또 그래선 안 되겠지만, 우리도 원래 처음에는 보통이지 않았었나. 가장 안타까운 말이다. "그러고 싶어서 그러나"


'기적과 감동을 추리한다' 맞다. 이제 히가시노 게이고는 기적과 감동까지도 추리할 경지에 이르렀다.






무지개는 평소에 보기 힘들지만 기적은 다르다.


이 책에는, 어쩌면 조금은 복잡할지도 모를 관계 속에서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3번 읽었다. 처음엔 줄거리를 더 자세히 파악하고 싶어서 재차 읽었고 또 한 번은 문득 나도 나미야 잡화점을 통해 위로받고 싶어 읽었다. 읽을 때마다 새로웠고, 방심한 찰나엔 어떤 감정인지 정확히 모를 눈물이 차오르곤 했다. 이 책의 묘미는 목차를 넘어갈 때마다 세밀하게 엮인 인물들의 관계를 알아갈 때이다. 어느 한 사람도 다른 인물들과 연관되지 않은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조금 복잡할지도 모르겠지만, 다시 보면 가까운 내 주변으로 던진 사소한 관심이 형성되었을 때, 위로는 시작됐다. 그들은 그랬다. 얽힌 여러 개의 끈 같아 보여도 사실은 단단하게 묶인 하나의 끈이었다.


나미야 유지 할아버지를 비롯하여 그의 첫사랑 미나즈키 아키코부터 잡화점과 환광원에 연관된 모든 인물들까지. 3~40년 세대를 거스르는 연(緣)이자 참으로 신비한 운명이다. 그런데 사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세대를 뛰어넘은 것뿐만이 아니었다. 작은 관심이, 위로가. 그렇게 기적이 되었을 뿐이다.


나미야 할아버지는 고민 상담 답문 편지를 쓰는 일로 노년의 삶에 행복을 느낄 수 있었고, 생선가게 뮤지션은 자신을 믿고 기다려준 아버지와 상담 편지에 답문해준 좀도둑 3인방, 그리고 세리를 통해서 본인의 꿈을 이룰 수 있었다. 세리와 다쓰는 가쓰로의 희생으로 소중한 생명을 이어나갈 수 있었고 미혼모 그린 리버의 딸은 친구 세리를 통해 엄마에 대한 원망을 감사함으로 바꿀 수 있었다. 고스케는 비틀스의 LP판을 사들인 친구의 여동생을 통해 40년 만에 진실을 알 수 있었고 펍 가게에서 흘러나온 오랜만인 비틀스의 음악으로 아픈 마음을 치유 받을 수 있었다. 하루미는 고스케에게서 조그맣지만 소중한 나무 목각 인형을 선물 받음으로써 장난감이라곤 없던 외로운 어린 시절 위안을 받았고 좀도둑 3인방의 조언으로 인해 성공을 이룰 수 있었다. 물론 하루미가 나미야 잡화점에 고민 편지를 쓴 계기는 이웃 언니인 시즈코(달 토끼)덕분이었다. 마지막으로 좀도둑 3인방은 대신 고민 상담을 해준 것에 대한 고마움의 보답이기라도 하듯, 나미야 할아버지에게 백지 편지에 대한 따뜻한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어떤 위로는 시간을 초월한 위로이기도 하다. 얼마나 기이하며 신비한 일인가. 하지만 잡화점을 찾아 준 손님, 부모님, 이웃 주민, 친구, 우연히 들른 펍 가게 사장… 위로의 대상은 살면서 스치듯 마주친 인연이 될 수도 있고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가까운 내 주변 사람이 될 수도 있다. 한 장의 편지, 목각 인형, 비틀스의 음악, 가족의 응원 한마디, 친구의 병문안… 대상도 방식도 이렇듯 비범하지가 않다. 너무나도 당연하다. 그런데 너무 당연해서 사람들은 그 순간을 놓치고 만다. 곁에서 사라지면 너무 쓰라릴 텐데. 당연한 것은 당연할 때 가장 소중한 것이다.


좀도둑 3인방은 고민 편지에 답문하는 내내 “우리 같은 놈들이 뭘 할 수 있는데? 돈도 없지 가방끈 짧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쩨쩨하게 빈집이나 털고 다니는 정도야. 제 앞가림도 못 하는 주제에 남의 고민 상담을 해주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고”라며 자신들의 처지를 비관한다. 하지만 그래도 그 중 한 명, 쇼타는 말한다. “대단한 충고는 못 해주더라도 당신이 힘들어한다는 건 충분히 잘 알겠다. 어떻든 열심히 살아 달라. 그런 대답만 해줘도 틀림없이 조금쯤 마음이 편안해질 거라고” 근사한 해결책을 제시해줄 순 없어도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의 어려움에 공감하고 긍정적인 한마디만 해준다면 세상에 이것 만큼 근사한 위로가 또 있을까. 결국, 이 세상에 쓸모없는 위로란 없다.


나도 나미야 잡화점의 의뢰인들과 다를 것 없이 고민이 있을 때, 힘들 때, 길을 못 찾을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뭐 별거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 엄청나게 대단한 사람에게 뭐 그렇게 대단한 위로를 받아본 적은 없다. 친구의 편지 한 장, 부모님의 격려, 길거리의 문구 한 문장, 음악 한 곡에 감격스러워 눈물이 났고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이렇게 쓰다 보니 “뭐 그렇게 대단한 위로를 받아본 적이 없다”라는 말을 취소하고 싶어졌다. 내가 여태까지 받은 위로가 대단한 위로구나. 문득 이 생각이 든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특별할 거 없는 잡화점에서 시간을 초월한 기적이 일어난다’ 저자 히가시노 게이고가 설정해 놓은 ‘잡화점, 기적’이 두 가지 장치의 목적은 어쩌면 매우 상반된 것들에서 독자가 느낄 수 있을 어색하고도 친근한 무언가의 감정이었으리라. 그래서 처음 이 책을 읽게 된 나의 계기 또한 제목에서 오는 어색함과 익숙함의 괴리 때문에 흥미로웠던 점이다. 시간을 초월한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판타지적이다. 하지만 잡화점은 전혀 그렇지 않다. 동네 잡화점에서 고민의 뜻을 가진 단어 ‘나야미(悩み)’와 이름이 비슷하다는 귀여운 해프닝으로 고민 상담이 시작됐다. 생을 마감하는 날만을 남겨두었던 우리네 노년의 나미야 할아버지와 한 번쯤은 상처받았던 적이 있는 자들이 함께 꾸며낸 신비하고 놀라운 기적. 엄청날 것 없는 장소에서 엄청난 일이 벌어지는 것, 엄청날 것 없는 사람에게서 받은 위로가 엄청난 힘이 되는 것.


내가 해석한바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 ‘기적’이란 소재를 이렇게 표현하고자 했을 것이다. ‘기적은 모두가 함께 썼다. 관계의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질 때 아름다운 기적이 쓰인다’ 마치 우리 주변에서도 일어날 수 있을 것만 같은 놀라운 기적을 기대하며 말이다. 모두가 이 책을 히가시노 게이고의 시간을 넘나드는 놀라운 판타지 소설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주변에 이 책을 읽으려 하는 사람이 있다면 책에 대해 이렇게 설명해 주고 싶다. 시간의 초월이 없고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저 그런 사소한 위로가 판타지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책이라고.



가장 마음이 짠했던 단락


"아버지, 나는 발자취를 남긴 거지?
실패한 싸움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뭔가 발자취는 남긴 거지?"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제 2장 한밤중에 하모니카를 / 가쓰로의 독백


책 속에서 내가 가장 애착이 가고 아끼는 부분은 ‘제2장 한밤중에 하모니카를’이다. 생선가게 뮤지션인 가쓰로가 보낸 고민 상담 편지에 좀도둑 3인방이 답문을 보낸다. 현재를 사는 도둑들은 생선가게를 물려받을 수 있음에도 갈팡질팡하는 가쓰로의 고민을 ‘배부른 고민’이라고 칭하며 직설적으로 말한다. 하지만 한밤중의 하모니카 연주를 듣곤 답장한다. 당신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믿어달라고. 그가 죽어가기 전 그 편지를 회상하며 아버지에게 고한다. “아 그런 건가. 지금이 마지막 순간인가. 그래도 나는 꼭 믿고 있으면 되는 건가. 내 음악 외길이 쓸모없지는 않았다는 것을 끝까지 믿으면 되는 건가. 아버지, 나는 발자취를 남긴 거지? 실패한 싸움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뭔가 발자취는 남긴 거지?”


그는 그렇게 죽어가면서도 한낱 도둑들이 보낸 편지 덕에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믿음을 놓지 않았다. 그가 만약 그 편지를 읽지 못하고 그냥 그렇게 죽어갔다면 그의 음악 외길 인생이 쓸모없지 않을 것이라는 최후의 믿음을, 그는 아마 놓아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는 내내 자신이 나미야 할아버지에게 고민 상담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사실은 당신의 편지를 좀도둑 3인방이 써줬어요”라고 누군가 알려준다 하더라도 가쓰로는 화내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믿을 수 있다. 나미야 할아버지라고 완벽한 사람이라 누군가의 고민을 들어준 것이 아니다. 쇼타, 아쓰야, 고헤이는 모두 자기 자신을 ‘일개 좀도둑’, ‘쓸모없는 사람’이라 했지만 좀도둑 3인방은 누군가의 가는 길에 평안을 주기도 했고 누군가의 성공을 돕기까지 했다. 불행한 유년시절을 보내기도 하고 도둑질만 일삼아온 그들의 삶이 절대 쓸모없는 게 아니라는 것을. 그러니까 이 세상에 쓸모없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저자는 이야기의 주체이기도 한 인물들을 ‘도둑’이라는 장치로 설정해두고 독자의 생각을 번뜩이게끔 한 것이다.


나미야 할아버지는 말했다. “고민 편지를 쓴 사람이 찾지 못하겠다는 길은 상담자가 그 길로 가라,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결국 자기 자신이 직접 길을 찾아 나가야 하는 것이야” 사람들은 선택의 기로에서의 결정을 타인의 의견만 수렴하여서 하지 않는다. 결국엔 그들 마음이 이끄는 곳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타인의 고민을 들어준다는 것은 그냥 그저 그 사람의 지친 마음을 위로해주는 것뿐이다. 이건 어떤 존재이더라도 모두가 가진 평범한 능력이자 힘이다.


도둑질한 후 우연히 잡화점에 들어오게 되고 하룻밤 이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기적에 가치를 더해본다면 그들의 행동에 뉘우칠 기회를 준 것이자 이름 모를 누군가가 해준 무언(無言)의 토닥임이었으리라.


“이제 자수를 하고 나면 우린 어떻게 살아가지?”하는 찰나에 생각 없이 우유 통에 넣었던 백지 종이에 대한 답문이 선물처럼 시간을 넘어 배달되어왔다. 나미야 할아버지의 편지는 아마 그들에게 두 가지 소중한 마음을 전달해주었을 것이다. “당신은 쓸모없지 않습니다”하는 위로와, “이렇게나 환상적인 위로를 나 대신 해주어 정말 감사합니다”하는 감사인사 말이다.



그 편지를 읽고 그들의 눈이 반짝였듯이 마지막 문장을 읽고 책을 덮은 후 나의 눈 또한 함께 반짝였다. 이렇게 고마운 책을 읽을 수 있어서 고마웠다.


우리가 사는 세상 속엔 나미야 잡화점처럼 시간을 넘나드는 판타지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책 속의 세상과 똑같이 쓸모없는 위로는 없고 쓸모없는 사람 또한 없으니까요. 이 또한 판타지라면, 우리 동네 평범한 잡화점에서도 기적은 일어나지 않을까요? 그렇기 때문에 - “대단한 내가 아니지만 당신을 위로해드릴게요, 당신은 쓸모없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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