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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마 Dec 14. 2023

저도 지방출장 편하게 가고 싶다고요!


나의 첫 직장은 반도체 장비를 만드는 회사였고, 나는 서울에 위치한 본사 총무팀으로 입사를 했다. 그 당시는 많은 회사들의 IMF로 인해 회사 운영이 어려워지던 시기였다. 우리 회사도 역시 비용 절감의 필요성으로 처음에는 서울의 큰 건물의 한 층을 다 사용하다가, 아주 작은 사무실로 축소했다가, 마지막에는 공장이 있던 경기도 화성으로 통합되면서 내려가게 되었다.

회사 규모를 줄이면서 서울 본사에서 근무하던 대부분의 직원들은 반 강제로 퇴사를 하게 되었고, 나는 공장이 있는 경기도 H 지역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서울에서 근무한다고 좋아했던 나의 첫 회사 생활은 이렇게 1년이 채 되지 않아서 노선버스조차 다니지 않는 경기도의 외곽으로 가게 되었다.





본사에서 총무팀 근무를 했지만, 공장과 통합이 되면서 공장에 있던 총무팀에서 본사 업무를 맡아 업무를 했고, 본사 총무팀에서 크게 중요한 업무가 없었던 나는 의료기 마케팅 부서로 발령이 났다. 그 부서는 회사 매출의 10% 정도를 차지했던 신생 부서로 외국산 뇌파측정기 장비를 국산화로 개발한 검사 장비를 전국 각지의 신경정신과, 대학병원 및 큰 병원에 홍보 및 판매하는 부서였다.


처음 마케팅이라는 업무를 접하면서 어려움도 있었지만, 사무실 안에서 업무를 했던 예전과 다르게, 팀 사수들과 함께 전국을 돌며 의료 장비 영업을 하는 것도 재미있겠다 생각했다.


나는 뇌파측정기라는 장비로 검사를 해 보면, 뇌파가 색으로 표현되는 것이 신기했다. 정상인 사람은 뇌파가록 파란 계열이지만, 질환이 있는 사람의 뇌파는 빨간색으로 표시가 되어,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문제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알록달록한 비주얼에 익숙해진 우리지만, 2000년경만 해도 신경정신과는 장비가 아닌 말로 환자 상담을 하는 병원이 대다수였기에 의사들을 설득하는 것이 무엇보다 힘들었다.


그 당시의 신경정신과 의사들은 말로 상담을 하고 진료를 볼 수 있는데, 굳이 큰 비용이 드는 뇌파측정기를 병원에 들여놓아야 하는 것에 의문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흔하지 않았던 첫 시도였기에, 웬만한 병원에서는 검토 조차 하지 않았고, 신규 개업을 하는 의사들만 홍보 차원에서 관심을 가지는 편이었다.


사실, 마케팅에 대해서 전공을 하지도 않았던 내가 했던 일은, 신경정신학회 의사들에게 홍보 우편을 발송하고, 한 달에 한번 개최하는 홍보 세미나 진행 준비를 하고,  관심 있어하는 의사들을 찾아서 전국을 돌아다니며 검사장비의 필요성에 대해서 소개하며 뇌파 측정기 장비 구매를 유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미 판매된 장비의 소모품들인 뇌파검사를 할 수 있는 젤과 저장 디스크의 잔여 용량 등을 관리해 주는 유지 보수 담당도 맡고 있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전국으로 출장을 가야 하는 상황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우리 부서의 임원이자 책임자인 이사님은 이상한 선입견이 있었다. 개방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 같으면서도, 여자 직원인 나에게만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엄격하셨다. 그중에 하나가 출장은 절대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사님의 고지식한 면 덕분에 나는 업무를 하기가 너무 힘들고 팀 내 사수들에게 눈치가 보였다.


우리 회사의 거래처인 병원들은 대부분 경상도 쪽이 많았다. 대구, 부산, 진주를 숙박 없이 하루에 다녀오려면 새벽에 출발을 해야만 했다. 혼자서는 장거리를 운전하고 다녀오기도 힘들고 업무 지원이 힘들어서 두 명씩 짝을 지어서 출장을 다녀오곤 했는데, 나와 담당을 맡았던 나의 사수는 나와 출장을 가기 위해서 나와 새벽 3시에 만나야 했다.


다행히 사수의 집과 나의 집은 가까운 거리인 것이 천만 대항이었다. 차로 10분여 거리에 집이 있던 우리는 새벽 3시에 우리  집 앞에서 만나서 대구에 있는 병원에 9시에 도착해서 원장님을 만나고, 1시에 부산에 있는 병원을 방문하고, 5시에는 마지막으로 진주에 있는 병원을 방문하고 돌아오면 다시 밤 12시가 다 되었다. 이런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정을 2주에 한 번씩은 방문을 해야 했다. 게다가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대전에 있는 병원, 전라도 광주에 있는 병원, 서울과 인천에 있는 병원을 돌아다니다 보면 오히려 출장을 가서 숙박을 하는 편이 훨씬 나았지만, 이사님은 절대 출장 승인을 내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항상 나와 업무 짝꿍인 사수만 잠도 자지 못하고 새벽 운전 밤운전을 담당해야 했다. 사실 나는 그 시절,  운전면허만 있고 운전을 하지 못했다.






그렇게 보낸 시간이 대략 1여 년 정도 되었을 시점, 나는 조금씩 퇴사하고 싶을 정도로 마음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역시 사람사이의 일이 퇴사의 가장 큰 원인이 되는 것 같다.


사내커플이었다가 결혼을 했던 사수의 부인은 공장 구매팀에서 근무하던 대리님이었다. 회사가 공장으로 통합되면서 나는 회사 직원분들과 함께 카풀로 출퇴근을 했었다. 내가 살던 지역에 많은 회사 분들이 살고 계셔서 카풀을 어느 분과 할까 선택을 할 기회까지 있었다. 제조 부장이신 분, 장비 영업을 하시는 분, 관리팀에 계신 분들도 계셨다. 하지만, 나는 나의 사수이자 사내커플인 사수부부와 함께 원하던 원하지 않던 카풀을 해야만 했다. 성격 좋고 친절하신 사수님은 매번 업무도 같이 하고 싹싹하게 일 잘하는 나를 귀엽게 봐주셨고, 당연히 그 커플과 함께 카풀을 해야 한다고 하셨기에 나는 늘 사수커플과 함께 출퇴근을 하고, 회사의 모든 행사에는 함께 참석을 하는 가족 같은 관계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나는 언제부터인가 사수의 부인인 대리님의 나를 보는  날카로운 눈빛을 알아챈 순간 불편하기 짝이 없는 시간이 되었다.


매번 출장이랍시고 새벽부터 10시간 이상을 운전하고 돌아오는 남편의 파트너는 여자신입사원인 나는 늘 그 대리님의 눈에 가시였을 터였다. 출장일정이 잡히면 나는 제일 먼저 그 대리님의 눈치를 봐야만 했다. 그리고 출장 후 만났을 때, 늘 얼굴은 웃으면서 인사하지만, 함께 카풀을 하며 출퇴근하는 차 안 공기는 냉랭함 속에서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사수 커플이 다툼이라도 한 이후는 회사까지 1시간을 말없이 가야 하는 시간은 숨 막히기까지 했다. 사실, 나 역시도 충분히 그 대리님의 마음이 이해가 갔기에 , 나는 방도를 찾아야만 했다.


내가 찾은 방도는 사실 멋지게 퇴사를 하고 싶었지만, 아직은 시기상조인지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갑자기 어려워진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나였기에 내 마음이 힘들다고 툭 하고 퇴사하기엔, 나의 어깨가 너무 무거웠다.


 그래서 생각해 낸 방도는 바로 운전이었다. 조금 한가한 날에는 회사차를 이용해서 낮에 회사 사수들에게 운전 연수를 시켜달라고 했다. 회사 차원에서도 운전하는 사람이 한 명 더 늘어나면 좋겠다고 생각해서인,  예전 사수들이 점심시간에 돌아가면서 운전 연습을 시켜주었다. 지방이었던 공장은 바로 앞에 고속도로 톨게이트가 있었고, 나의 첫 연수는 일단 고속도로를 타는 것부터 시작이었다. 어느 추운 겨울날, 고속도로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내 등에는 땀이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그렇게 나는 운전연수를 나의 첫 회사에서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시작하게 되었다.


사실, 나의 사수님은 그 이후로도 나에게 운전대를 절대 맡기지 않았다. 다만, 커플인 대리님께는 올라오는 길에는 내가 운전했다고 얘기하기로 암묵적인 동의가 있었을 뿐이다.


내가 지금도 속도감 있는 운전을 즐기고, 웬만한 눈총에 모른 척할 수 있는 노하우가 생기게 된 것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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