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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ylogic Aug 20. 2022

글꼴 원도란 무엇인가요?

종이 원도 만들기

디지털 데이터로 모든 정보가 담기는 현대에는, 그 자료의 시작이 무엇인지 찾아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간단한 복사 명령으로 책이 복사되기도 하고, 영화가 다운로드되고,  폰트 파일이 복제되기도 한다. 

내가 만든 글꼴들이 복사되어 사용되는 경우도 마음이 아프지만, 복사한 글꼴에 자신들이 만들었다고 이름마저 변경하여 다시 팔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무너진다.


종이에 적혀있거나 그려진 자료는 쉽게 그 창작의 근본을 찾아갈 수 있다. 누군가 이 글꼴을 누가 만들었냐고 물으면 종이 원도 뭉치를 그에게 보여주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간단한 방법으로 글꼴에 대한 권한을 주장할 수 있지만, 디지털 데이터는 그러한 근본 찾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최근에 생산된 많은 창작 자료들은 나름의 복제 방지를 위한 장치나 본인들만이 확인할 수 있는 워터마크 등을 삽입하여 자료를 만들지만, 디지털 데이터를 복제하지 않고, 디자인을 흡사하게 만들면 원저자가 권리를 주장할 수도 없는 것이 현재의 우리 법이기 때문이다.

(글꼴이 어떻게 저작 업체가 아닌 글꼴 업체에 의해 복제되고 표절되어 판매되는지에 대해서는 다음에 따로 한번 이야기하겠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예전 이야기를 하면 꼰대 취급을 받지만 우리의 글꼴 원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안다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 같기에 간단히 전해보려 한다.


종이에 그리는 원도


다른 업체가 어떠한 형태로 글꼴 원도를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회사에서 종이에 원도를 그렸을 때는 4cm x 4cm 크기의 정방형 틀 위에 글자를 그렸다. 우리 회사 또는 예전의 모든 글꼴 제작 회사가 종이 원도를 만들었던 주요한 이유는 수동 식자판용의 글꼴을 만드는 것이었으므로, 이렇게 규격화된 원도 종이 위에 글꼴을 디자인하고 이를 모아 사진을 찍어 상품화하는 일련의 과정 중 그 첫 번째 작업이 종이 위에 글꼴을 그리는 것이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결과물이 "원도"이다.

원도가 제작되는 과정의 일부 결과물이 아래의 사진 들이다.


왼쪽은 둥근고딕의 원도 작업 당시의 스케치이고, 우측은 당시에 구상 중이던 새로운 명조의 스케치이다.

우측의 명조체 스케치가 그려진 방안지 형태의 틀이 당시에 우리 회사에서 사용하던 원도의 기본판이다.

최초에 종이 위에 사진과 같이 글꼴을 디자인하고 이 위에 먹물로 외곽선 안에 글꼴을 칠하게 된다.


왼쪽은 방안지 틀 위에 그려진 부호에 화이트로 수정을 가한 것을 보여주는 작업 중인 원도이고, 우측은 둥근 고딕의 글자 일부가 완성되어 트레이싱 페이퍼에 옮겨진 모습니다.

1차로 완성이 된 자소들은 트레이싱 페이퍼를 이용하여 다시 그려지거나, 사진으로 찍어서 인화지로 출력하여, 이 자소를 잘라 반복 사용되는 원도에 붙여져 사용되기도 하였다. 말하자면 "가"에 사용된 "ㅏ"와 "카"에 사용된 "ㅏ"를 이렇게 반복하여 사용 하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디지털 시대의 Ctrl-C , Ctrl-V인데,  당시에는 자소 하나의 복사 및 재 사용도 한참의 작업이 필요한 것이었다.


종이 원도의 의미


종이 원도로 수동식자판의 전 글자를 모두 만드는 진한 한 작업이 새로운 글꼴의 창작에 대한 확실한 증명을 보여주기도 하고, 차후의 작업을 위해 확실한 자산을 남겨두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던 때가 있었다. 

한번 복사 키를 눌러 모든 글자를 복제하여 사용할 수 있는 현시점에는 바보 같은 노동 작업이라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당시에는 기존 원도를 기반으로 한 작업을 위해서도 원도의 가치는 매우 큰 것이었다.


글꼴 편집 프로그램의 명령 하나로 글꼴 두께를 조정할 수 있는 지금과 달리, 가는 글자에 두께를 더하여 두꺼운 글꼴을 만드는 것도 트레이싱 페이퍼로 자기 복제를 하거나, 원도에 사진을 찍고 그 위에 먹으로 덧칠을 하는 작업이 필요했던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 시절이 고작 30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당시에 만들었던 원도 중 최종까지 보관했던 대부분의 원도는 국립한글박물관에 기증하였고, 언젠가 한글의  초기 기계화 과정을 궁금해하는 이들에게 좋은 자료로 사용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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