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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PD Mar 13. 2020

아, 너무 긴 꿈을 꿨다.

1년 간의 미국 인턴을 끝내고 한국행 비행기 안에서 눈을 떴을 때 

덜그럭 덜그럭.
그리고 뭔가 짭조름한 냄새.



자연스레 눈을 떴고, 눈 앞에 펼쳐진 것은 

1년 내내 봐 왔던 미국 자취방 천장이 아닌 비행기 팜플렛 주머니.


헉, 하고 일어났다. 코로나19 때문인지, LA발 한국행 밤 비행기에는 한 줄에 한 명씩 앉힐 만큼 사람이 없었다. 덕분에 나는 23년 인생 처음으로 비즈니스 클래스를 호가하는 '누워서 비행기 타기'를 할 수 있었고 1년치 짐을 싸그리 쌌던 피로 덕분인지, 이런 저런 생각들로 그 동안 잠을 잘 이루지 못 해서 인지. 눕자마자 눈을 감고 10시간 내리 잠들었다. 분명 기내식을 먹고 바로 잠들었는데, 기내식 소리에 깬 것이었다. 짧은 시간 잔 줄 알았는데 그게 10시간이었다.


눈 앞에 보이는 비행기 팜플렛 주머니를 한참동안 응시하며 여기가 비행기라는 것을 인지하는 데에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것도 한국 가는 비행기. 집 가는 비행기.


https://youtu.be/NbWIQsTiZGo

출발할 때 멀어지는 LA를 바라보며 줄기차게 들었던 'Good Bye LA'.


분명 한국에서 미국 가는 비행기가 어제 같은데. 나는 또 이렇게 다시 가는 비행기 안에 있었다. 문득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냥 지난 1년들이 모두 꿈만 같았다. 방금도 기내식 소리에 깨기 전에, 뭔가 굉장히 무섭고 기괴한 꿈을 꾼 것 같았는데. 그 꿈 보다 지난 1년이 더 꿈 처럼 느껴졌다.


처음 도착 했을 때의 두려움, 첫 출근의 그 기분, 그 이후의 여러 사고들, 인생 최고로 암울했던 그 여름, 언제나 그랬듯이 다시 이겨내려 노력했던 가을, 많은 사람들을 만났던 겨울, 해질녘의 허르모사 비치, 산타모니카의 야경, 말리부비치에서의 브런치, 디즈니랜드, 유니버셜 스튜디오, 하늘을 나는 듯 했던 코스의 하프 마라톤, 바다, 산, 바람, 풀, 냄새, 공기, 그 곳에서 만났던 사람들, 어쩌면 평생 다시는 못 볼 수도 있는 사람들 그리고 나를 보러 먼 곳 까지 와 줬던 사람들. 남은 물건들을 가져가라고 집으로 불렀는데 갑자기 냉장고에서 남은 와인과 크림치즈를 먹으며 마지막 파티로 배웅해준 고마운 회사 동료들.




모두 그냥 10시간 짜리 꿈 같았다. 

참 좋았다. 언제든 꺼내어 볼 수 있는, 선명한 꿈.


마냥 행복했던 1년은 아니었다. 오히려 참 힘들었던, 이억만리 타지에, 아무 연고도 없이, 사람도 없이, 돈도 없이. 혼자서 이런 저런 일들을 모두 이겨내기엔 분명히 힘들었다.


그래서 더 좋았던 1년이었다. 그럼에도 다 이겨냈기 때문에, 이겨내진 못했더라도, 그 사건들을 통해 성장했기 때문에. 모두 너무 좋았다. 단 하나의 사건도 부재해서는 안 됐었다. 그 사건들을 통해 1년이 지나 나는 지금의 내가 되었고 나는 지금의 내가 좋다. 내 모습과 생각, 가치관이 모두 좋아. 이게 엄청난 일 이라는 것을 안다.


지금은 모두 꿈처럼 느껴지는 내가 경험했다고는 믿기지 조차 않는 그런 경험들이지만 비단 경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 경험들은 모두 나의 생각 말투 모습 두피 손톱 밑 알음알음 스며들어 나에게 영원히 있다.


파란만장한 미국에서의 1년을 보낸 뒤 나는 조금 더 덤덤해졌고, 모든 일에 의연해졌고, 예전엔 중요했던 것들이 귀찮아졌고, 이젠 조금 더 실리를 찾고, 진짜 중요한 게 뭔지를 안 것 같고, 정말로 나를 믿게 됐고, 목표의 스케일이 원대해졌으며, 정신이 건강해졌고, 나 자신을 정말로 소중히 대할 수 있게 되었다.


그 1년의 이야기를 여기에 풀어 보려고 합니다.


언젠가 다시 힘이 빠진 상태의 내가 읽고 이 때의 패기를 되찾을 수 있기를, 지나가던 누군가 읽고 도전정신과 용기를 가질 수 있기를. 그저 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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