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호박
작년에 몇몇 농가가 미니 단호박을 심고 재미를 봤다는 소문이 퍼졌는지, 이 동네의 농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단호박을 심었습니다. 제주 서쪽을 지나가다가 비닐 터널이 쳐진 밭을 보신 분들도 계실지 모릅니다. 초당 옥수수 아니면 단호박이었겠지요. 단호박은 모종을 키웠다가 3월 중순에서 말이 되면 밭에 아주 심기(정식)를 합니다. 바닥에 물을 줄 수 있는 호스를 깔고, 비닐을 덮고, 모종을 심은 뒤 그 위로 비닐 터널까지 씌우지요. 모종을 심는 건 사람이 직접 하는데, 비닐을 덮고 비닐 터널을 씌우는 건 트랙터가 한답니다. 직접 봤으면 좀 더 실감 나게 설명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게도 당시엔 육지에 있었기에 제가 말씀드리는 건 어머니가 설명한 장면입니다(내년을 기약하지요).
단호박은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는 작물입니다. 어릴 땐 물만 주면 됩니다. 허나 5월 정도가 되어 호박 줄기와 잎이 터널 안을 채울 정도가 되면 얘기가 달라지죠. 우선 터널에 씌워진 비닐을 칼로 살짝 찢어 숨통을 틔워주어야 합니다. 너무 더워도 안 되고, 추워도 안 되니 적당히 눈치를 보다가 숨구멍을 만들어야 해요. 1-2주 뒤에 더 큰 구멍을 만들어줍니다. 팔과 손목이 아파서 비닐을 다 찢어버리고 싶겠지만, 참아야 합니다. 그러다 호박꽃이 하나 둘 피면 비닐을 모두 걷어냅니다. 폐비닐은 돌돌 말아 한쪽 구석에 쌓아두어야 하는데, 비닐은 또 어찌나 길고 무거운지(이게 다 제 업보입니다!). 터널의 뼈대인 지지대도 모두 땅에서 뽑아야 합니다. 뽑다가 튕기는 바람에 입술을 맞거나 손가락에 멍이 들기도 했어요. 자, 그럼 끝일까요? 아닙니다. 이제 수분 과정이 남았습니다. 수꽃의 꽃가루가 암꽃으로 날아가야 암꽃 아래에 호박이 맺히거든요. 인공 수분을 하는 농부들도 있지만, 저희 가족은 벌과 파리와 바람을 비롯한 자연의 힘을 믿어보기로 했어요.
6월 말이 되면 슬슬 호박을 따는 사람들로 동네가 새벽부터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저희 가족은 단호박을 남들보다 조금 늦게 심었기 때문에, 7월 둘째 주가 되어서야 수확에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하필 우리의 첫 번째 단호박 밭은 물이 잘 빠지지 않는 곳이라 모내기 장화까지 준비했습니다. 빨간 소쿠리와 과수용 가위를 들고 발이 푹푹 빠지는 땅을 지나니 흙이 잔뜩 묻은 단호박들이 보이는군요. 모든 호박을 따서는 안 됩니다. 호박 끝이 코르크처럼 마른 호박을 따야 합니다. 그게 바로 익었다는 증거거든요. 소쿠리는 호박으로 금세 가득 찹니다. 그럼 소쿠리를 들고 밭 바깥으로 다시 나갑니다. 호박 무게로 발은커녕 발목 위까지 흙 속으로 빠지지요. 트럭에 켜켜이 놓인 콘테나에 호박을 부었으면, 빈 소쿠리를 들고 다시 밭으로 가서 호박을 땁니다. 트럭이 밭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면 이 과정은 없어도 됐을 텐데, 이게 다 밭이 질어서 그렇답니다!(대형 드론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며칠 뒤에 트럭으로 들어가 보려다 나오지 못할 뻔했어요. 이웃 농부님도 호박을 실은 트럭이 나오지 못해 트랙터로 끌어내야 했고요.
점심을 먹고 나면 창고로 이동해 오전에 따온 호박을 세척합니다. 이 역시 비가 너무 많이 온 탓입니다. 진흙에 구른 호박을 받고 싶어 하는 소비자는 아무도 없을 테니까요! 물로 호박에 묻은 흙을 잘 닦아내고, 상판 위에 하나하나 올려 건조합니다. 단호박은 반드시 열흘 이상 후숙해야 달아지거든요. 요즘은 콘테나에 담아 후숙 하는 농부님들도 있지만, 아버지는 이 방식을 고수하시더라고요. 저도 이렇게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고요. 깨끗하게 씻긴 호박을 보고 있으면 힘들었던 오전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을 것 같지만 땀에 젖은 옷 덕분에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렇게 단호박을 잘 쌓아둔 뒤에는 대형 선풍기를 틀어 환기를 시킵니다. 아마도 이 선풍기는 여름 내내 돌아갈 것입니다. 마지막 호박이 창고를 떠날 때까지 말이죠.
하지만 호박은 여기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두 밭은 첫 번째 밭보다 덜 질었기 때문에 인부님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중국에서 온 다섯 명의 인부들이었지요. 세 분은 호박을 따면 남은 두 분은 호박을 옮기는 일을 맡았습니다. 새벽 6시부터 오후 4시 반까지 일하죠. 우리는 편하냐고요? 절대 아닙니다! 새벽 6시 반에 아침 참을 챙겨주는 것을 시작으로, 인부들이 콘테나에 담은 호박을 차에 실어 창고로 갖다 놓고, 호박을 일단 바닥에 쏟아 놓고(어차피 세척해야 하니까), 다시 빈 콘테나를 가지고 밭으로 갑니다. 점심시간이 되면 차에 태워 근처 식당에 데려가서 밥도 먹여야 하지요. 오전 10시 반과 오후 3시쯤에 간식도 틈틈이 챙겨줘야 하고요. 수백 개의 콘테나에 담긴 호박을 어떻게 보관해야 할지, 흙투성이 호박을 어떻게 세척할지 고민도 해야 합니다. 그래도 다행히 인부님들 덕분에 그 많은 호박을 하루 만에 다 땄지 뭡니까. 정말 고마운 분들이에요.
진짜 문제는 그다음 날이었어요. 수 천 개의 호박들을 세척해야 했거든요. 우리를 불쌍히 여긴 이웃사촌 영숙이 이모가 같이 호박을 세척해 주겠다며 아침 8시에 창고를 찾아왔습니다. 오전 내내 닦았는데도, 1/10도 닦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볼일이 있어 창고를 찾은 옆 동네 농부님을 보더니 영숙이 이모가 한 마디 하시네요. "어? 완승이 삼춘! 삼춘 집에 세척기 있지 않애?" 완승이 삼춘과 잘 아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때 주변에 계시던 분들이 부추긴 덕분에 우리 가족은 완승이 삼춘의 세척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야호! 앗, 그런데 어제 호박을 너무 많이 실었던 탓인지 타이어에 바람이 살짝 빠진 것 같네요. 일단 타이어 공기압부터 확인해야겠습니다. 그런데 붕붕 카센터 사장님이 보이지 않네요. 타이어에 바람을 넣지 못하면 세척장까지 갈 수 없는데, 우리는 결국 손으로 그 많은 호박을 닦아야 하는 것일까요?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