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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토끼 Jan 23. 2018

[나로 살기]
02 어린 엄마가 바라는 것

아이를 낳고 키우며 차마 엄두를 내지 못했던 일은 '출근'이다. 망설이기만 하다가 영영 집에 주저앉을까 걱정이 되었다. 큰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집을 나서기가 더 힘들어질 듯했다. 저지르는 수밖에 없었다. 원서를 내고 면접을 보았다. 그렇게 실험이 시작되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6년 만이었다.


시간에 맞춰 아이들을 등하원 시키는 것부터 긴장이 되었다. 저녁이 깊기 전에 아이들을 재워야 했고, 이른 아침에 깨워야 했다. 다그치고 달래며 출근을 서둘렀다. 제 시간에 도착하는 것조차 큰 도전인데, 일터에는 새로 배울 일이 가득했다. 처음 다루는 모든 일이 손에 설었다. 낯선 동료들과의 식사조차 불편했다. 배우고 헤매며 하루를 마치면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 시작되었다. 각오는 했지만 막상 닥쳐오는 일들이 힘겨웠다.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나 싶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두 가지 생각이 선명해졌다. 힘들더라도 일을 하고 싶은 동시에, 힘드니까 다 그만두고 싶었다.





내게 아이들은 부담이었다. 사랑을 충분히 주고 싶은 만큼 무게가 느껴졌다. 그러나 아이들 뒤로 숨고 싶지도 않았다. 아이들을 핑계로 자아실현을 미루고 싶지 않았다. 두 가지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다보니 엄마라는 자리가 버겁게 느껴졌다. 고민의 핵심은 하나였다. 자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과 자기를 내어주는 것 사이에서, 어느 곳에 서는 것이 적절할까에 대한 문제였다. 이런 생각을 하는 자체가 피곤했다. '아이를 키우기 때문에' 하는 고민이라는 결론에 다다르니 푸념이 나왔다. "아이들에게 손이 너무 많이 가요. 아직도 멀었어요. 언제 다 끝날런지 아득해요."


내 말을 들은 지인이 말했다. '지금이 예뻐요. 나중엔 그 때가 그리워요.' 지금은 몸이 힘들지만 나중에는 정신적으로 힘들다고 했다. 아이들을 떠나보낸 헛헛함을 아는 이들은, 자꾸만 지금이 좋은 때라 말한다. 그래, 나도 안다.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다 큰 아이들'에 대한 애잔함과 상실감의 정도가, 아이들을 내 삶의 한가운데에 놓아두기 위해 겪는 고통스러움과 다르지 않게 느껴진다. 힘들게 내 꿈과 계획을 조정하거나 포기하며 아이들을 받아들였는데, 다시 힘들게 그들을 떠나보내고 나를 되찾아야 하는 것이다. 둘 다 자기를 변화시켜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둘 다 고통스러운 것도 당연하다. 그런데도 두 번째 변화를 겪은 이들은 자꾸 첫 번째 변화를 겪는 이들에게 '그때가 좋다'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니 내가 듣고 싶은 말은, '아이들이 어린 지금을 즐겨라. 힘든 건 순간이니 참아라.'라는 말이 아니다. 즐기는 건 노력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진짜로 즐겨져야 즐기는 것이다. 그 시절을 다 보낸 사람들이 하는 말은, 때로는 너무 멀고 때로는 폭력처럼 다가온다.





그런 말 말고 차라리, 그냥 엄마 대신 아이들 손을 잡고 한 바퀴 산책이라도 하며 엄마에게 쉬는 시간을 주면 좋겠다. 힘들어하는 시간도 사치인 것처럼 느껴지게 하지 말고, '그땐 나도 힘들었다'며 힘든 마음을 다독여주면 좋겠다. 멀리 보며 현재를 견디게 하는 것보다, 지금 여기의 행복을 바라보도록 도와주면 좋겠다. 모든 여자들이 홀로 이 고통을 견디지 말고, 나도 견뎠으니 너도 견디라고 하지 않고, 함께 손을 잡아주면 좋겠다.


그렇게 힘을 얻은 엄마는, 다시 아이들이 예쁘게 보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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