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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엉이숲 Feb 15. 2021

서두르지 마, 이 겨울은 너무 길어


겨울엔 밤이 일찍 찾아와 오래 머문다. 푸른 어둠이 두꺼운 담요를 펼쳐 새벽을 가두고 아침은 창백한 유리창에 어린다. 잠은 깼지만 일어나기가 싫다. 이불 속 온기는 따뜻하고 발끝에 닿는 감촉은 부드럽다. 무기력한 게으름은 물속에 풀어지는 꿀처럼 달콤해서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긴다. 반듯이 누워 보았다가 모로 누웠다가 하는 사이 바깥은 환해졌다. 무릎을 구부려 이불속의 온기를 옆으로 밀어내고 일어난다. 이제 하루를 시작해보자.


   

커피머신 물통에 물을 가득 채운다. 버튼을 누르고 예열되기를 기다리는 사이 냉장고에서 요거트와 사과, 냉동실에서 모닝빵 한 개와 치즈를 꺼낸다. 빵을 반 갈라 치즈조각을 얹어 에어프라이기에 넣고 5분에 맞춘다. 째깍째깍 타이머 소리가 식사준비를 재촉한다. ‘서두르지 마, 이 겨울은 너무 길어.’   

  

밥그릇에 요거트를 덜고 사과를 깍뚝 썰어 넣는다. 건강하게 먹으려고 만든 수제 요거트지만 단맛을 즐기고 싶어 꿀을 한 숟갈 넣는다. 이럴 거면 사먹으련만 오늘도 단맛은 나를 이끈다. 찐득한 꿀이 사과 조각 위에서 미끄러져 요거트 속으로 묵직하게 가라앉는다. 단맛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건강식에 대한 생각은 증발한다. 치이이잌하고 에어프라이기 안에서 치즈가 지글거리는 소리가 난다. 둥근 빵에서 고소한 영혼이 새어 나온다. 이제 에스프레소버튼을 누른다. 드르르륵 하고 커피콩 갈아지는 소리, 위이이잉 하고 커피 내려오는 소리가 가라앉은 거실을 흔든다.     

부엌 창가에 기르는 작은 컵속의 접란. 겨울의 회색을 위로해준다.


자잘한 균열이 셀 수 없이 퍼져나간 오래된 커피 잔에 뜨거운 액체가 내려오고 흰 갈색의 거품이 커피위에 덮인다. 눈으로도 맛을 보는 것 같다. ‘땡’하는 타이머소리에 깜짝 놀란다. 매일 아침마다 들으면서도 나는 어리석게 타이머란 녀석에게 기습을 당한다. 기계의 서랍을 열어 빵을 구조한다. 체다가 모짜렐라에 섞여서 하얀 결에 녹아 들어가 있다. 미처 숨지 못한 치즈는 술래에게 들킨 듯 지글거림을 멈추는 중이다. 무자비한 육식동물처럼 입안에 침이 한가득 고인다.   

 

빵은 바삭하고 촉촉하고 따뜻하다. 가루를 우수수 떨어뜨리며 한입 베어 먹고 커피를 마신다. 아침이 이제 완전히 밝아졌다. 일요일 아침 식구들은 깊이 잠들어 있지만 깨우지 않는다. 식구들은 아침이 밤이다. 아직 동면에 빠진 동료들보다 먼저 깬 곰처럼 어슬렁거리며 서식지를 한 바퀴 돌아본다.     


어젯밤 읽다 만 책들이 책상위에 한권, 식탁과 소파 위에 한권 씩 펼쳐져 있다. <곤충의 비밀>은 메뚜기가 산란관을 땅속에 꽂아 알 덩어리를 만드는 페이지에, 소설책 <복자에게>는 고냉이돌 송사 부분에 <나방애벌레도감>은 긴꼬리산누에나방에 책갈피가 꽂혀져 있다. ‘지난 가을에 내 손가락을 짧고 뻣뻣한 털로 꼭 붙들고 놓아주지 않던 애벌레가 긴꼬리산누에나방이었구나.’ 애벌레는 나뭇잎을 여러 장 붙여 만든 고치 속에서 겨울을 견디고 있을 것이다. 우화할 때 고치를 싸악싸악 하며 썰고 나오는 장면을 올해는 보면 좋겠다. 언젠가 보게 되면 잊지 말아야지, 책을 덮기 전에 한 번 더 눈도장을 찍는다.    



<복자에게>만 남기고 책상 위에 놓아둔 책들을 책꽂이에 꽂았다. 다음 주 수요일에 화상으로 책모임을 하기로 했으니 오늘 한 번 더 읽어야겠다. 아침 해가 베란다를 지나와 책상으로 길게 팔을 뻗고 있다. 손톱만큼의 햇볕이라도 내게 와주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모습에 마음이 말랑말랑해진다. 봄이 되어 일을 시작하면 이렇게 여유롭고 호사스러운 아침은 누릴 수 없을 것이다. 미숫가루를 흔들어 넣은 우유를 정지신호일 때 한 모금씩 마시는 아침식사를 하게 되겠지. 아니 일을 시작할 수는 있을까. 마침내 햇볕은 펼쳐진 책까지 다가왔다. 다정한 빛은 글자들에게 온기를 전해줘 눈으로도 따스함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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