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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엉이숲 Feb 23. 2021

갈피를 못 잡을 땐 책갈피

    

나는 책을 좋아한다. 책이 귀하던 때 학급문고의 몇 권 안 되는 책을 닳도록 읽기 시작하던 때부터 지금까지 책을 좋아하고 가까이 하는데, 가끔은 “문학소녀” 라는 말도 듣는다. 그 말을 하는 사람은 내가 문학 뿐 아니라 과학, 역사, 사회, 예술 책들을 골고루 읽는 지에는 관심이 없을 것이다. “책을 좋아하는 걸 보면 저이는 세상물정 모르는 소녀 감성을 가졌겠지.” 짐작하여 체면치레의 칭찬을 한 것이다.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이니 “아녀요. 시간이 많아서 읽는 거지요.” 라고 마다한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생각이 깊다. 보이는 것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고 한다. 나는 사물과 대상의 내면에 있는 성질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다.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책에 의지한다.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얼마든지 필요한 정보를 쉽고 빠르게 얻을 수 있는 것을 안다. 하지만 인터넷으로는 알고 싶은 것을 다 알지 못하고 깊이 알기 어렵다. 게다가 엉뚱한 곳으로 빠져 내가 무얼 하고 있는지 잊어버릴 위험이 크다. 숲 일을 하면서 보게 된 곤충 관련 책이 책꽂이 한 칸을 차지한다. 풀밭과 나무에서 만나는 곤충들의 이름이 궁금해서 곤충도감을 찾곤 한다. 이름을 아는 것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고 곤충의 생태가 궁금해서 많은 책들을 읽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책에서 보았던 곤충들이 현장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경험들이 반복되어 책은 나의 뒷심이 되어 주었다.

  

 

산책을 하다가 내장이 몸 밖으로 나온 것 같은 애벌레를 발견했다. 자세히 보았더니 애벌레가 똥 무더기를 등에 짊어지고 있었다. 끈끈해 보이는 똥자루가 내장처럼 보였던 것이다. 더럽고 징그럽단 생각에 이마가 찡그려졌다. 사무실에 들어와 책을 찾아보니 왕벼룩잎벌애벌레가 천적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하는 위장행동이었다. <곤충의 밥상>을 쓴 정부희 작가는 곤충의 행동과 습성을 이해하고 알아 가다 보면 인간 행동의 근원이 찾아질 거라고 했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부하는 인간을 감히 몇 밀리미터 밖에 되지 않는 곤충에 비교하다니 말도 안 된다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작은 세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우주를 발견하는 작가의 겸손한 관찰을 읽으며 수수께끼를 하나씩 풀어나가는 것이 나는 기뻤다.   

  

둔산 시청역 6번 출구 가까운 곳에 자주 가는 헌책방이 있다. 나는 이곳에서 필요한 책을 사기도 하고 내게 필요 없어진 책을 팔기도 한다. 책 꽂을 공간이 없어져서 책을 바닥에 쌓기 시작하면서 내 방에 책 나무가 자라났다. ‘더 이상은 안 되겠어, 책들을 자기 갈 길로 보내야겠어.’ 하고 결심했다. 내 책장을 떠난 책들이 어느 곳엔가 가서 자기 할 일을 하게 될 것이다. 내 책을 팔고 사 온 헌 책을 읽다가 책 장 사이에서 메모지를 발견했다. ‘오늘 비 온대요. 우산 가지고 가요.’ 라는 종이 모서리는 어떤 사람의 손끝에서 닳아졌는지 반듯함을 잃고 둥글어져 있었다.
 
 내 삶이 반듯한 페이지를 거쳐 둥글어지고 닳아지기를, 갈피를 잃고 헤맬 때 책갈피를 열고 길을 찾을 수 있기를 나는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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