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운 마음을 들고 숲으로 갑니다. 잘 풀리던 일은 생각하지 못한 걸림돌을 만나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제자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오히려 그동안 애써 이룬 성과도 없어질 것 같습니다. 원망하고 비난하는 나쁜 마음이 얹어져 몸이 무겁습니다. 멍하니 창밖을 그저 바라봅니다. 느릅나무 가지를 벗어난 얄브스름한 구름 한 조각이 앞으로 나갑니다. 가지를 흔든 바람이 뒤따라가 구름을 흩뜨려버립니다.
낮은 산이어도 처음 오르는 길은 경사가 가파릅니다. 가파른 경사를 지키는 복자기나무의 수피가 겹겹이 누더기를 덧댄 모양으로 눈길을 끕니다. 물에 젖은 교과서가 부풀어 오른 듯한 줄기와 가지 끝에 아직은 눈뜨지 못한 싹이 입을 다물고 뾰족합니다. 쪽동백나무, 때죽나무의 새싹도 아직 눈을 뜨지 않았습니다. 갈잎이 덮고 있는 비탈에서 티끌만 한 새싹은 눈에 띄지 않습니다. 산비탈에 흘러내리려 하는 돌 부스러기들 위로 으름덩굴 같은 덩굴손들이 위태롭게 돌무더기를 품습니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한 숲길이 부드럽게 구불거리며 앞으로 나아갑니다. 긴 나뭇가지가 휘어져 좁은 길을 막아섭니다. 가지만 보면 무슨 나무인지 모르지만 꽃을 보니 올괴불나무입니다. 작은 꽃잎 몇 장이 ‘나 여기에 있어요.’하며 발길을 막아섭니다. 새순도 돋지 않은 곳에서 옅은 분홍 빛깔이 반가워 마스크를 내리고 코를 킁킁 거려 봅니다. ‘다음은 내 차례야.’ 하고 솜털을 뒤집어쓴 잎눈이 꽃들을 채근하고 있습니다.
돌무더기가 막아선 산에 돌탑을 쌓아 길을 냈습니다. 돌을 덮은 낙엽이 팔랑 움직입니다. 줄장지뱀이 가벼운 갈잎을 뾰족한 입으로 밀어 올리고 나왔다가 깜짝 놀라 낙엽 속으로 달아납니다. 돌탑이 줄지어 선 비탈땅에 진달래가 피었습니다. 빗물을 머금은 꽃 색이 진합니다. 떨어질 듯 위태로워 보이는 돌탑은 담쟁이가 올라타 단단해졌습니다. 바싹 말랐던 이끼는 봄비를 힘껏 빨아들여 보송한 포자낭을 피워 올렸습니다. 쓸모없다는 돌산을 남에게 의지한다고 비난받는 덩굴이 끌어안습니다. 음습하다고 꺼리던 이끼는 바위에 스며들어 나에게 부여된 생명의 기회를 놓치지 않습니다.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소망하는 수많은 기원이 얹어진 돌탑은 이미 묵직합니다. 따스한 나뭇등걸에서 다람쥐가 앞발을 모으고 무언가를 먹다가 허술하게 쌓은 돌탑의 틈으로 쏙 들어갑니다. 돌 틈에 다람쥐의 거처가 있는 것 같습니다. 돌 틈 어딘가 뱀의 거처도 있을 텐데 둘이 안 만나면 좋겠습니다. 행복과 건강과 성공과 무탈의 소망이 쌓이고 그 위로 또 다른 기원이 올라갑니다. 오늘 내가 올린 돌은 나를 어떻게 기억할까요. ‘내일 다시 올게, 또 보자.’라고 돌에게 작별 인사를 합니다. 서툴게 올라간 희망의 틈에 구멍이 숭숭 났습니다. 꽃샘바람이 돌의 틈으로 빠져나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