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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엉이숲 Aug 30. 2021

비 오는날 다시 만나요

  

여름이 가고 있습니다. 여름과 가을이 마주 보는 사이에 어떤 시간이 있습니다. 두 계절이 만나는 그 시간에 비가 옵니다. 진초록이던 비목 숲이 열기를 뺀 식은 잎으로 빗물을 흘려보냅니다. 올여름 숲에서 장엄하고 찬란한 무대를 꾸민 풀과 나무들에게 보내는 가을비의 박수 소리가 힘차게 개울로 흘러갑니다.     


나무수국의 하얀 꽃 볼이 빗방울을 머금고 길가를 향하여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큰 꽃 뭉치는 군데군데 갈색으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갈변한 꽃 안쪽에 황록색의 희미한 열매가 오종종 모여 있습니다. 길고 지루하고 뜨거운 속도가 열매를 만들었습니다. 열매에 맺힌 작은 물방울에 내 얼굴이 비칩니다. 더위와 피로에 그을린 내가 볼록렌즈 속에 보입니다. 대면과 비대면이 거듭되는 속에서 계획과 실적이 오르내려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고 나만의 일도 아닙니다. 결핍은 오히려 내가 겨우 가진 실낱같은 힘을 간신히 이끌어 냈는지 쌀 톨 만한 결실이 맺혔습니다. 꽃과 물방울과 나를 대면하는 시간이 다행스럽습니다.


    

요즘 오솔길 가장자리에 백양꽃 상사화가 많이 보입니다. 둔덕진 비탈에 물기를 머금어 더욱 또렷해진 주황빛 꽃 무리에 눈길이 갑니다. 큰 나무 그늘 아래에 작은 관목들이 들어차 상사화를 위협하는데도 연둣빛 줄기를 볕이 드는 길가 쪽으로 굽혀 진황색 꽃들을 피워냈습니다. 아름다운 꽃을 보고 걸음을 멈춰 감탄합니다. 누가 심지도 않았는데 언제 이렇게 자라난 걸까. 그러고 보니 작년에도 이 길을 걸으며 상사화를 보고 감탄했던 기억이 납니다. 검은 꼬리를 늘인 제비나비가 상사화에 날아듭니다. 물기 머금은 꽃을 건드린 제비나비의 날갯짓에 물방울이 튕겨나갑니다. 먼발치에서 보는 나비의 희끗한 뒷날개는 찢겨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 숨결이 임박한 듯 제비나비는 꽃잎 위에 가만히 있습니다. 찬란했던 여름의 막바지 시간이 나비의 날개에서 빛을 거두어갑니다.  


  

계곡으로 내려오는 거센 물줄기가 뽀얀 광목처럼 눈부십니다. 자갈들이 거칠게 쌓여 있는 골짜기를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흐르는 물이 앞 다투어 밀려옵니다. 뿌연 안개가 바위 이끼를 적시고 시야를 흐립니다. 서늘한 공기에 소름이 오소소 일어납니다. 늦여름 매미가 우렁차게 노래하는 숲 속에 계곡물의 세찬 소리가 더해져 귀가 먹먹해집니다.    


갈참나무 고목에서 옹이구멍을 찾아냈습니다. 움푹한 나무 동굴 속에는 청개구리가 살고 있습니다. 청개구리는 오늘도 얼굴만 내놓고 바깥세상이 어떤지 내다봅니다. 청개구리의 눈에 모래땅이 깊게 파인 것이 보이는지 모르겠습니다. 고운 모래가 하얀 고랑을 이루며 어린이놀이터 아래로 구불구불한 길을 냈습니다. 단풍나무 줄기에 어린 사마귀가 날개도 없는 배 끝을 잔뜩 치켜들고 오르는 것이 보입니다. 내가 지켜보는 게 신경 쓰인다는 듯이 세모난 고개를 휙 돌려 노려보고 다시 뒤뚱거리며 높은 곳으로 향합니다.
    

여름이 물러가는 8월의 숲은 비에 젖은 벚나무 잎들이 우수수 떨어져 노란빛이 환합니다. 환한 낙엽들이 숲길에 조그맣고 말갛게 점을 찍어 놓았습니다. 이야기 속의 남매가 길을 잃지 않으려 표시한 것 같은 낙엽을 따라 산을 내려옵니다. 비 오는 산책길에 발걸음 소리가 맑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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