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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실궁리 Oct 29. 2021

텔레비전을 버리지 못했다

선물의 의미

 우리 집에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가전제품이 텔레비전이다. 아이에게는 재밌고 자극적인 프로그램을 접할 수 있는 신문물일지라도 우리 부부에게만은 아니다. 우리는 스피커로 음악을 듣거나 고요하게 지내는 편이 많았다.

 텔레비전은 신혼 때 마련했으니 연식이 7년이 다되어 간다. 그래서인지 어느 순간부터 화면 오른쪽 귀퉁이 부분에 엘이디 전구 세 개가 훤하게 빛을 쏘고 있었다. 화면이 바뀌는 장면마다 그 부분이 신경이 쓰였다. A/S를 받으려니 부품이 없다며 새로 사기를 권했고 조금만 더 나빠지면 바꿔버려야지 생각했다.


 텔레비전을 보는 목적이 아닌 다른 이유로 애착을 가지고 있는데 결혼 선물로 받은 거대 가전제품이기 때문이다. 대학 때 친한 오빠들이 막내 여동생 결혼하는데 큰 거 하나는 해줘야 한다며 십시일반 돈을 모아서 사준 대형 가전이었다. 내가 이렇게 큰 선물을 받아도 될까 싶을 정도로 고맙고 감격스러웠다.


 이 오빠들로 말할 것 같으면 김해 언저리 대학에서 같은 과라는 이유만으로 만난 이들이었다. 군인에서 민간인이 되어 학교에 복학 한 예비역이었는데 나를 포함한 여자 후배들의 밥을 사주는 데는 후했다. 대게는 신입생들의 애교 섞인 밥 사달라는 연락을 거절하지 못했다. 대학생 신분으로 평소에는 먹기 힘들었던 피자, 파스타 같은 음식을 먹으면서 이야기하고 웃고 떠들었다. 그들의 군대 이야기, 시답잖은 농담, 서로 헐뜯으며 시시덕거리는 시간이 신났다. 지금이야 그들도 똑같은 대학생이었는데, 싶지만 당시 대학에 갓 들어간 신입생의 눈에 그 오빠들은 나보다 더 큰 '으른(어른)'같았다. 군대로 세상을 겪어본 그들은 자신의 앞가림은 물론이고 학점도 놓치지 않으려 공부에 전념하는 의지가 남달랐다.

 

 복학생 3명에 편입생 2명으로 구성된 예비역 다섯 사이에서 나는 세상 물정 모르는 막내 여동생 같은 존재였다. 우리 사이는 어느 동아리에서나 일어날 법한 남녀의 연애 관계로 이어지지 않았고 지극히도 우애가 깊은 형제애와 같은 끈끈함으로 있었다. 처음에는 어, 저 오빠 좀 괜찮은데?라는 마음이 눈곱만큼 있다가도 친해지면서 알게 된 실체에 환상이 깨져버렸다. 하지만 끊어내고 싶은 사람들은 아니었다. 가족 같은 편안함이 있었다.


 그들 중 두 명과는 장기 유럽 드라이빙 투어를 가기도 했다. 셋만 간 것이 아니라 여행을 주도했던 D와 그의 아는 형, 여자 친구, 동생들 (나와 또 다른 동생)이 모여 다섯이 갔다. 해군을 전역했던 D는 군대에서도 배를 타고 해외를 많이 다녀봤다고 했다. 당시 해외라고는 한 번도 나가보지 못한 나는 D의 이야기가 신기하고 재밌었다. 자연스럽게 그가 계획한 투어에 발을 담그게 되었다.

 45일간의 동유럽 투어 루트를 짜고 예산을 세우고 식량을 챙겼다. 가난한 대학생들이 예산을 줄일 수 있는 가장 큰 부분은 숙박이었고 매일 텐트를 칠 수 있는 캠핑장에서 여행의 고단함을 달랬다. 내비게이션도 없던 시절 지도를 펴고 노트북에 지피에스를 달아 차를 운전했다. 같은 길을 여러 번 돌 때도 있었고 잘 못된 길을 가다 목적지와 너무 멀어져 도착지를 바꾸기도 했다. 웃기도 많이 웃고 싸우기도 많이 싸웠는데 그렇게 더 돈독해졌다.

 먼저 해봤던 좋은 것들을 혼자서만 하지 않고 주변 사람들을 끌어 들었던 D는 좋은 것을 함께 나누고 싶었던 것 같다. 그 여행을 시작으로 나의 해외여행에도 물꼬가 텄으니 정말이지 길을 열어준 사람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런 그와 같은 마음으로 내 결혼을 축하해준 오빠들의 선물을 치우려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꼭 텔레비전을 봐야만 그들이 생각나는 건 아니지만 우리를 이어주고 있던 선물이라 생각하니 텔레비전이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선물에 대한 고마움으로 "텔레비전 볼 때마다 오빠들 생각할게요!"라고 했던 말이 발목을 잡았다. 아직은 조금 더 옆에 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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