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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사이 Sep 24. 2023

행궁동

아홉수 이야기 5


내가 좋아하는 어릴 때 사진이 있다.


수원화성 앞에 펼쳐진 잔디밭에서 뽁뽁이 소리가 나는 공주님 얼굴이 달린 운동화를 신고 뛰어다니는 사진. 아마 할아버지가 찍어주셨던 것 같다.


내게 행궁동, 아니 행궁동이라는 이름도 생소할 정도로 화성 근처의 동네는 정말 '동네'였다.


20년 전 네다섯 살배기 아이에게는 최고의 동네였다. 무슨 이유에선지는 모르겠지만 문구 도소매상점이 굉장히 많았다. 장난감과 예쁜 색연필들이 20개씩 묶여있는 커다란 문구점에 가면 사지 않아도 마음이 그득해져 기분이 좋았던 기억이 난다.


집에서 조금만 나가면 커다란 버들나무가 가득한 길에 물이 흐르고, 조금 더 가면 연무대 앞 잔디밭에서 마음껏 뛰어놀 수 있었다. 평생을 도시에 살았는데도 어릴 때 사진을 보면 꼭 시골 아이 같은 게 있다. 경주 사람들이 집 앞에 왕릉이 당연한 것처럼 내게도 화성은 그저 놀이터였다.


뛰어놀기엔 좋았지만 고 또래 아이들끼리, 부모들끼리 쉽게 뭉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기에 유일한 친구는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의 친구들.


성인이 다 되도록 지겹게 들었던 이야기가 쪼끄만 나를 안고 할아버지가 매일 팔달산을 오르내렸다는 소소한 무용담이었다. 나가기 좋아하는 어린아이를 집에만 둘 순 없으니 어떻게든 매일 데리고 나가셨던 듯하다.


애써 꺼내려고 하지 않으면 먼지만 쌓여갔을 기억들은 동네 상권이 살아나면서 새삼스러워졌다. 처음엔 내가 살던 그 동네가 아닌 줄 알았다. Sns에 올리기 좋고 커피 맛도 좋은 카페들이 하나 둘 생겨나며 상권은 끝을 모르고 넓어졌다.


쌀집을 하시며 매일 먹을거리를 쥐어주시던 앞집 아주머니 댁이 카페로 변했다. 참새가 방앗간 못 지나치듯 스티커 구경을 하러 갔던 문구점 골목이 간판을 바꾸고 맛집 인스타그램에 오르내린다. 아주 빛바랜 추억이 새겨진 장소가 전혀 다른 색으로 변하는 경험은 때로는 힘들다. 빛이 바랠 때까지 떠올려보지 않고 내버려 둔 나 자신이 비추기 때문이다.


볼 때마다, 느낄 때마다 마음이 콕콕 찔려 나는 한동안 행궁동을 싫어했다. 나의 가장 외롭고 순수한 시절을 지켜준 할머니 할아버지를 잊고 살았던 것이 부끄러웠다. 그저 사랑만 받았던 때였다. 아무도 나를 미워하지 않고 나의 건강과 행복만을 바래주던.


동네는 저렇게 멋지게 변해 가는데, 젊은 사람이라고는 학교 학생들 밖에 없던 동네에 mz들이 몰려드는데, 정작 거기에 살던 사람들은 서로를 잃고 나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떠올릴 때마다 아렸다.


행궁동에 가면 돈을 내고 맛있는 커피와 예쁜 인테리어를 경험해도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새로운 기억이 덧입혀져도 아쉽고 쓸쓸한 기분이 든다. 화려하고 트렌디한 경험보다 소중한 건 내가 사랑하는, 나를 사랑해 준 사람들과의 기억이라는 것을 갈 때마다 아프게 깨닫는다.


과거에 머무르지 말자고 다짐을 하면서도, 받은 것을 떠올리면 그 기억을 어떻게 소중히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니 사실은 알고 있다. 찾아가는 것.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보는 것. 몸을 움직여 감사와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가장 맞고 확실한 방법임을 알면서도 바쁘다는 핑계로, 내 미래를 핑계로 애써 외면한 날이 더 많다.


추석이 오니 자연스레 가족이 떠오르나 보다. 평소보다 전화 한 통, 사랑 담긴 말 한마디 더 할 수 있는 명절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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