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by 구름나무

밤새 무섭게 쏟아지던 비가 날이 밝으며 잠시 주춤했다. 날은 밝았으나 여전히 어둑하여 새벽이 계속되는 것만 같다. 축축하게 우거진 숲에서 비 그친 사이 새소리가 들려온다. 물기가 느껴지지 않게 낭랑하다. 비가 잦아진 틈을 타 마당을 살펴보러 나간다. 이파리마다 빗물을 잔뜩 머금은 작물들이 축축 늘어져 있다. 지지대를 보완하여 망치로 꽝꽝 두드려 깊이 박는다. 줄도 더 바짝 조여 준다. 줄기가 사방으로 뻗는 포도넝쿨은 지지대로 감당할 수 없어 빨래 건조대에 받쳐 집개로 잡아 둔다. 목가적인 풍경과는 거리가 멀지만 빨래 건조대, 아주 효율적이다.


며칠 동안 줄곧 내린 비에 마당엔 흙이 파여 물길이 생겼고, 텃밭 둘레 나무들은 바닥에 닿을 듯 늘어졌다. 환하게 꽃을 피우던 데이지도 푹 젖어 드러누웠다. 데이지보다 키 큰 개망초는 어째 꼿꼿하다. 꽃잎이 자잘해 물기를 덜 머금었나 싶은데,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의 힘인가 싶기도 하다. 마당 일이 끝나기도 전 바람이 몰려와 젖은 숲을 또 사정없이 휘어잡는다. 무슨 바람이 비보다 더 극성이라고, 맥락 없는 시비를 걸어본다. 익숙한 바람이 아니다. 어디 아주 먼 곳에서 오는 것 같다. 음과 바위로 뒤덮인 명왕성보다 먼, 그러니까 온라인 세상 같은 곳에서. 온라인 게임을 지금껏 해 본 적은 없는데, 디선가 들어 본 배경음은 생물을 참 외롭게 하는 음이었다. 위이잉, 아무도 살 수 없을 것 같은 삭막한 음조.


바람과 함께 비가 또 시작되었다. 하던 일을 그만둘 수 없어 손을 바삐 움직인다. 미로 을 매고 텃밭으로 전진해 오는 넝쿨들은 손으로 잡아챈다. 온갖 곳에서 뻗쳐오는 넝쿨들. 올해는 유난히 덩굴 식물들이 기승이다. 가시박, 돌콩, 칡, 노박, 환삼, 미국실새삼. 덩굴이 휘감은 작물이나 나무는 시달리다 못해 고사하고야 만다. 줄기를 잡아당겨 뿌리까지 아주 뽑아야 하는데 쉽지 않다. 덩굴식물의 생명력은 막강하다. 아무리 걷어내도 결국엔 주변을 점령한다. 가뭄이 길어도, 비가 넘치게 내려도 끄떡없다. 장소도 가리지 않아 전봇대를 타고 오르고, 길가, 둔덕 온갖 곳을 싱싱한 잎으로 덮어버린다. 가만 보면 예쁘다. 칡도 가시박도 돌콩도 환삼도. 더 이상 붙잡을 것이 없어 허공을 향해 뻗은 줄기와 잎은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게 된다. 뿌리도 없이 다른 식물 줄기를 칭칭 감아 살아가는 미국실새삼은 좀 징그럽다. 예전에 흔히 쓰던 노란 고무줄같이 생겼는데, 그야말로 다른 식물 줄기를 칭칭 고무줄처럼 옭아매어 살아간다. 뿌리가 없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뿌리를 숙주의 줄기 속에 박고 살아가기에, 실새삼을 떼어 내면 타들어간 것 같은 자국이 남는다.


가시박넝쿨, 돌콩넝쿨


환삼넝쿨,노박넝쿨


칡넝쿨


비가 등을 떠밀 듯 퍼부을 때는 할 수 없이 호미를 던지고 들어온다. 집 안도 사정은 마당과 비슷하다. 보이지 않게 자라나는 것들 덩굴처럼 온 집안을 점령하고 있다. 지나친 습도가 그들의 세력을 한층 키워놓았다. 그냥 당할 수는 없지. 알코올과 식초, 식용소다를 분무기에 담아 전투적으로 사용한다. 의류와 침구엔 KF94 마스크를 쓰고 알코올을 분사한다. 바닥은 식초나 소다 희석 액을 뿌려 마른걸레로 닦아낸다. 욕실이나 부엌 치약을 주로 사용한다. 하루 일과를 마무리할 땐 특히 세면대와 개수대에 민트 향이 나는 치약을 골고루 발라둔다. 밤새 치약으로 방어를 하고 아침에 닦아내는 것이다.


유월의 마지막 날. 비가 그치지 않는다. 어젯밤 호우주의보는 호우경보로 바뀌었다. 산사태 주의 경고 문자도 날아왔다. 마당고양이들은 외출을 금지당했다.


외출을 금지 당해....

비 구경만 하염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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